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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이산, 정조를 욕보였다

 

이산, 정조를 욕보였다

 - 정조가 청와대 대변인인가?


오늘 이산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 귀를 의심케 하는 대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산은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주 테마다. 노론은 기득권세력이고 귀족이다. 그들의 힘은 너무나 강해 왕의 권세를 뛰어넘는다. 왕이라 함은 주권자를 의미한다. 정조는 주권을 농락당하던 시절에 주권자로 태어났던 사람이다.


마치 지금 주권자들이 5% 땅부자들과 재벌에 치어 사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정조의 영이 안 서는 것처럼 주권자들을 이롭게 하는 명령은 5%와 재벌들에 의해 무력화되고 있다. 주권자의 이해를 반영해야 할 국가운영라인도 재벌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다. 의사결정권자들과 여론주도자들이 ‘떡값’에 취해 있는 것이다.


난전 상인들과 시전 상인들의 대립에서 정조는 난전의 편을 들었다. 오늘날로 치면 재벌이 아닌 중소기업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또 오늘날로 치면 특목고, 자사고, 일류 학벌이라고 할 수 있는 문벌을 마다하고 한미한 집안 출신이나 서얼을 등용하려 했다.


이랬던 정조다.


최근 이산에선 정조 즉위 초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정조가 기득권 귀족들의 권력독점을 흔드는 개혁을 하려 하자 노론이 파업으로 맞선다. 오늘 방영분에선 분노한 정조가 노론 지도자를 찾아가 아래와 같은 말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들으면서 얼마나 놀랐던지 받아 적었다.


“내 그대들 없이 조정을 꾸리다보니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소. 그것은 조정의 아문과 관료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오. 살펴보니 그것은 폐주 연산군 이래 늘어난 아문과 관료의 수가 시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오.

 하여 난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돼온 관제와 조직을 새로이 일신하여 대폭 축소하고, 작고 효율적인 조정을 만들어 모든 것을 연산군 이전으로 되돌릴 것이오. 각 아문은 소임을 면밀히 살펴 존폐를 결정할 것이고, 상호 유사한 기능은 서로 통폐합시키고, 각 조의 낭관 이상의 관원은 상호 교류시켜 폭넓은 안목을 키울 것이오.

관원들 또한 불필요한 직무나 직위가 있다면 관직을 없애거나 중임토록 할 것이니, 이제 경들이 조정으로 돌아온다 해도 조정에 남은 자리는 채 반도 되지 않을 것이오.“


정조가 정부 대변인이 돼버렸다. 이건 완전히 현 정권의 ‘작은정부 - 정부조직개편’ 논리 아닌가! 노무현은 졸지에 연산군이 됐다.


정권 잡자마자 부자들로만 내각을 꾸리고, 친 재벌정책을 펴겠다는 정부의 논리를 정조가 대변하는 것이 말이 되나? 정조는 이명박의 남자가 아니다.


노론 신하들이 정조에게 항변하는 논리는 딱 정부조직개편 반대하는 야당의 논리였다.


“수백 년 이어져온 나라의 관제를 한 번에 바꾸시려 하시다니요. 이는 절대 불가한 일이옵니다.”

“이처럼 막중한 국사는 양사대간들의 합의를 거쳐야 하는 일이옵니다.”


하지만 정조는 밀어붙인다. 왜냐하면 이런 상식적인 논리로 정조를 흔드는 세력은 사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도 이런가?


새 정부가 기득권 구조를 부수기 위해 정부조직개편을 하고 야당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것에 반대했나? 현재 야당이 과거 노론과 같은 한국 사회 귀족세력인가?


작은 정부의 폐해는 드라마에도 나타났다. 노론 신하들이 물러나 작은 정부가 되자 의료 서비스가 마비돼 역병이 번지고, 치안 서비스가 마비돼 도성 치안이 불안해졌다. 요즘 소방관들이 긴급근무에 내몰리는 것처럼 정조의 군사들도 긴급경계근무에 나섰다.


조선은 통치구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나라였다. 주권과 권력의 불일치가 있었던 것이다. 주권은 왕에게 있는데 권력은 사대부에게 있었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부를 쌓았다. 그리고 파당을 지어 국정을 농단했다.


정조는 주권자의 나라를 만들려 했다. 그것은 사대부들을 규제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의미한다.


이산에서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그토록 대단한 것이 이 나라 사대부라면 난 그대들이 다시는 이 같은 전횡을 부릴 수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는 것이오.”


이 대사는 지금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주권자들이 땅을 사랑하고 미국을 사랑하는 5% 신종 사대부에게 할 말이다.


사극에 현실 정치를 집어넣으려거든 맥락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귀족과 싸운 정조에게 지금 정부를 대변케 하는 게 말이 되나? 어설프게 현실 정치 대입하다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신뢰를 잃지 않길 바란다. 이산의 팬으로서 하는 말이다.


* 출간 안내 : 제 책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