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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레미제라블 이것이 21세기의 뮤지컬이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와서 예고편 영상을 찾아보니 다시 눈물이 흐른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 얘기다. 예고편 영상에선 극중에서 앤 해서웨이가 부른 ‘I Dreamed a Dream’이 흐른다. 과거에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가 끝난 후 주제곡을 1년 이상 못 들은 적이 있다. 그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너무 아파졌기 때문이다. 요즘엔 그리 큰 감정의 흔들림 없이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마음의 상처엔 시간이 약인가보다. 아무튼. 앤 해서웨이의 ‘I Dreamed a Dream’이 그때처럼 듣기만 해도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건 영화 ‘레미제라블’이 그만큼 묵직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가볍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였다면, 설사 노래가 좀 서글픈 내용이라 하더라도 눈물까지 나진 않았을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이게 과연 상업 뮤지컬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무겁고 어둡다. 그래서 가슴이 움직인다. 일반적으로 재밌는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서사시의 감동이다.

 

 기본적으로 ‘레미제라블’은 밝게 만들기가 힘든 작품이다. 제목부터가 ‘레미제라블’아닌가.(‘Les Miserables’은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 이 작품은 혁명기 프랑스 민중들의 삶을 그린 대서사시다. 혁명은 결코 몇몇 사상가의 이론이나 논객의 주장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고통으로 점철된 민중의 삶, 그 고통이 마침내 현실을 지옥으로까지 만들 때 혁명은 일어나는 법이다. ‘레미제라블’의 원작자인 빅토르 위고는 ‘단테가 (’신곡‘으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내고자 했다’라고 했는데, 그 지옥이 바로 ‘레미제라블’에서 펼쳐진다.

 

 그런 지옥도를 대표적으로 그려낸 것이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판틴이 매음굴에서 자신의 좌절된 꿈을 ‘I Dreamed a Dream’이라고 노래하는 장면이다. 이 노래는 수잔 보일이 영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 도전해 불렀었는데, 당시에 전 세계에서 최소한 수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보고 눈물지었었다. ‘레미제라블’에서 좌절된 민중의 꿈을 상징했던 ‘I Dreamed a Dream’이, 현대판 신분상승 판타지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여성에게 스타의 꿈을 이루게 한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바로 이런 게 21세기의 풍경이다.

 

 

 

 

◆'레미제라블‘의 현대성

 

 나는 뮤지컬 영화중에선 ‘그리스’나 ‘사랑은 비를 타고’, ‘로키 호러 픽쳐쇼’ 등을 아주 좋아한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작품인데, 이 영화들의 특징은 아주 밝다는 데 있다. 특히 ‘그리스’를 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구김살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들의 인생엔 도무지 고통이란 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너무나 밝고 유쾌한 아이들.

 

 이 영화들이 그렇게 밝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때는 세상이 밝았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한다. 1970년대 말에 급격히 상황이 악화되는 바람에 1980년대 레이건 보수주의가 등장하긴 하지만, 어쨌든 1970년대까지는 그 밝음의 낙관주의가 남아있었고 그런 분위기가 ‘그리스’ 같은 영화에 투영되었을 것이다.

 

 당시엔 세상이 점점 풍요로워졌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를 말한다. 제3세계엔 그때나 지금이나 황금기 따위는 없다. 그때 미국에선 서민들이 교외 주택을 소유한 중산층이 되어갔고, 그 자식들이 ‘그리스’에서처럼 놀러다니거나 ‘로키 호러 픽쳐쇼’ 같은 일탈을 즐겼다. 청년들의 낙관적인 일탈은 1960년대 말에 절정에 달했는데, 몇 년 전에 인기를 얻은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가 당시 청년문화에 대한 추억을 담았었다.

 

 하지만 21세기엔 더 이상 낙관적일 수 없다. 세계를 풍요로 물들일 것 같았던 미국의 신경제는 결국 금융버블이었음이 밝혀졌다. 빚내서 집을 샀던 서민들은 그 집에서 쫓겨났고, 시대의 키워드는 ‘분노’가 되었다. 다시 ‘비참한 사람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60년대 이래 수십여 년 만에 제1세계에 시위대가 전면적으로 등장했다.

 

 

 

 우리만 88만원 세대가 아닌 것이다.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닥친 고통이다. 이제 사람들은 꿈을 잃었다. 꿈을 이룰 가능성이 사라지자 꿈이 더 중요해졌다. 그러자 전 세계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이 등장해 ‘꿈팔이’를 하게 된다. 도무지 오디션 말고는 꿈이 없는 암울한 시대. 이런 시대에 어떻게 ‘그리스’처럼 웃고 즐긴단 말인가? 구김살 없는 청년들은 사라졌다. 이제 청년들의 얼굴엔 고통과 분노의 주름이 깊게 패였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이다. 상업 뮤지컬 영화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투박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뮤지컬. 인물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화장을 거의 안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프랑스 민중들처럼 온몸으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스튜디오 녹음을 거부하고 현장녹음을 고집함으로서, 그 고통을 토해내는 현장의 소리를 잡아냈다. 그야말로 21세기의 뮤지컬이다.

 

 아쉬운 게 있다면 감동과 함께 지루함도 있다는 점이다. 너무 길고 노래도 너무 많다. 이왕 영화화할 거라면 좀 더 영화답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 영화스타들 위주로 캐스팅하다 보니 노래실력도 조금 아쉽다. 하지만 감동이 그 아쉬움을 덮는다. 영화를 보기 전에 주요 곡들을 미리 들어두면 작품을 더 재밌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