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이 2017년 12월에 개봉했다. 원래대로라면 대선이 막 치러졌을 시점이다. 올 대선 국면의 흥행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을 수 있다. 하지만 대선은 진작 치러졌다. 때를 놓쳤다고도 할 수 있지만 관객의 반응이 뜨겁다. 국민이 대통령을 끌어내린 촛불집회 1주년이기 때문에 더욱 뜻 깊다.
블랙리스트가 맹위를 떨치던 당시부터 준비된 작품이다. 시나리오와 초기 기획 작업을 할 때는 비밀리에 진행했다고 한다. 정권으로부터 어떤 탄압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송강호는 ‘택시운전사’ 제의를 받은 후 불이익을 걱정했고, 장준환 감독은 ‘1987’을 남몰래 준비했다. 그런 시절을 불과 몇 달 전까지 우리가 견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뜨겁게 반응하는 것이다.
‘1987’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고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한 시점에 촛불집회가 터졌다. 시민항쟁을 필름에 담기 시작했는데 현실에서 또 다른 시민항쟁이 펼쳐진 것이다. 참으로 공교로운 역사의 교차다. 이희준은 ‘1987’의 시나리오를 읽은 후 지난 겨울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렇게 1987년에서 2017년으로 역사는 이어진다.
영화는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정권은 당연히 은폐하려 했고, 그 전 같았으면 은폐됐을 것이다. 당시는 대공수사실에서 사람 하나 죽어나가도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다. 하지만 1987년엔 달랐다. 그땐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대의에 시민적 합의가 이루어지던 시점이었다. 군사독재 종식이 시대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은폐공작은 역부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을 했다. 부검을 명령한 부장검사, 타살 의혹을 전한 의사, 사인조작을 거부한 국과수 부검의, 보도지침을 거부한 기자들, 진실을 밖으로 전한 교도관, 그것을 발표한 종교단체 등 모두가 불의한 거짓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역사가 바뀌었다.
영화는 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 보여준다. 그때는 요즘보다도 훨씬 폭압적인 탄압이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기본적인 윤리를 지켰고 세상을 바꿔냈다. 최근 정권 치하에서도 사람들이 저마다의 직업윤리를 지켰다면 국기문란 사태가 가능했을까? 물대포에 맞아 죽은 사람의 사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라고 발표한 것과 같은 일들이 부도덕한 권력을 받쳐준 건 아닐까?
하지만 작년 겨울 보통사람들이 1987년의 그때처럼 광장에 모였고 다시 한번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놨다. 영화의 제목이 원래 ‘보통사람들’이었다고 한다. 1987년이나 2017년이나 보통사람들이 움직일 때 세상이 바뀐다.
김윤석, 유해진, 하정우, 설경구, 박희순, 오달수, 김의성, 이희준, 여진구, 강동원, 문성근, 우현, 문소리, 고창석 등 많은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이 영화의 대의에 범충무로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충무로만의 공감대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수립 당시 민주주의의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이젠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사람들이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 그래서 ‘1987’의 대의에 일반 관객들의 공감과 지지가 나타난다.
영화를 보면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헌신, 희생을 통해서 이룩된 것인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짓밟혔을 때 이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인 곳이 되는지도 드러난다. 그 폭력에 짓밟히는 사람들, 그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감동을 쥐어짜는 신파 스토리는 없지만 여기에 그려진 역사 자체가 그렇다. 1987년 6월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그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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