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능 음악 칼럼

나는가수다, '분장실의 김선생님'의 교훈

<나는 가수다>가 방영된 당일밤, 관련 기사에 항의 댓글이 육천 개 정도가 쌓이는 것까지 봤다. 내가 확인한 이후에도 수많은 댓글이 쌓였을 것이다. 이 정도면 일 년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넷심 폭발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분노한 것일까? 일단 원칙이 깨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다.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김건모의 관록이다. 김건모가 <나는 가수다> 출연자 중에 가장 선배이고, 가장 으리으리한 경력의 소유자라는 것이 사태를 매우 악화시켰다.

만약 재도전하기로 한 것이 정엽이었다면 어땠을까? 정엽이 꼴찌를 했다고 치고, 그때 선배 가수들이 모두 나서서 이번이 처음이니 정엽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자고 했다면? 심지어 선배 중의 하나가 정엽 대신에 내가 빠지겠다고 했다면? 그래서 제작진이 정엽에게 재도전 기회를 줬다면?

그랬으면 원칙이 무너졌다는 쓴소리는 어차피 들었겠지만 지금처럼 엄청난 반발은 없었을 것이다. 김건모에게 재도전 기회를 주자고 했던 이소라나 김제동은 비난을 듣고 있지만, 정엽을 구해준 선배들은 칭송 받았을 것이다.

그럼 정엽과 김건모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정엽은 후배이고 김건모는 선배라는 차이가 있다. 원칙을 깨면서까지 약자를 구해준 것이 아니라, 강자가 그 위세로 원칙을 무너뜨린 것 같은 구도가 됐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일제히 김건모를 싸고 도는 모습은 마치 <개그콘서트>의 '분장실의 강선생님'을 보는 것 같았다. 거기서 후배들은 대선배인 강유미 앞에서 벌벌 떨었다. 강유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너나할 것 없이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시청자는 한국사회의 지나친 위계질서를 통렬히 풍자했다며 열광했다.

'분장실의 강선생님'은 1인자인 강유미와 2인자인 안영미에게만 우스꽝스런 분장을 시킴으로서 권위를 해체하고, 군림하려는 자들을 조롱했다.

<청춘불패>에서 한선화 몰카가 방영된 후 시청자들이 격렬하게 반발한 일이 있었다. 예능에선 흔한 몰카였지만 이것이 특히 문제가 된 것은 한선화가 가장 후배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태우는 '가수들의 위계질서' 운운하며 한선화를 몰아붙였다. 시청자들은 몰카 그 자체보다 '위계질서'에 격분했다.

반대로 <남자의 자격>에서 1인자인 이경규가 몰카를 당했을 때는 통쾌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이경규는 이 프로그램에서 후배들에게 쩔쩔 매는 수평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오랜 슬럼프에서 탈출했다. 이경규는 후배에게 멱살을 잡히면서 대인배로 거듭난 것이다.

김건모가 깨끗하게 승복했다면 딱 이경규의 구도가 될 수 있었다. 반대로 후배들이 그를 떠받들면서 관객의 투표를 뒤집는 모습은 영락없는 '분장실의 강선생님'이었다. 마침 김건모는 립스틱분장까지 했다. 이렇게 오묘한 우연이 또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탈락했다며 진행을 거부한 이소라나, 재도전 기회를 주자던 김제동은 졸지에 안영미의 위치에 서버렸다.


- 중요한 건 비난이 아니라 교훈 -

시청자들은 과연 정엽같은 후배가 탈락했어도 그들이 김건모 때처럼 격하게 반응했겠는지 묻고 있다. 후배가 꼴찌를 했을 때도 프로그램이 원칙을 깼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어서 확인할 수 없는 물음이지만, 이런 물음이 나오도록 한 것 자체가 프로그램의 패착이고, 김건모의 압도적인 위상이 이런 '선배-후배' 문제를 떠올리도록 한 원인일 수밖에 없다.

이런 연유에서 '나는 선배다'가 됐다는 비난이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즉 <나는 가수다>는 원칙과 상식, 신뢰가 무너진 사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와 특권이 판을 치는 악습마저도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특히 더 격분의 대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대중이 권위적인 모습이나 거만한 모습에 얼마나 예민한 지는 지난 연말 고현정 연기대상 파동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번에 정엽은 쟁쟁한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반면에 김건모는 출연진 전체가 떠받드는 느낌이었고 본인도 그것을 당연시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7등이 됐을 때는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자꾸 다른 이유를 댔다. 이렇게 스스로를 높이면 보는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황정민이 '나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찬사를 보낸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당연한 상을 받는 순간에 스스로를 낮췄기 때문이었다. 김건모도 관객의 투표 앞에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으면 지금쯤 찬사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제 막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다. 이번 재도전 파동(?) 관련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데, 필요한 건 비난보다 교훈일 것이다. 앞으로 잘 하면 된다. 앞으론 누구든지 시청자와 약속한 원칙을 엄수하고, 시청자 앞에서 겸허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출연자와 제작진이 과도하게 강자 대우를 하면 시청자가 싫어한다. 유재석, 강호동 같은 국민MC들이 왜 프로그램 속에서 고생을 사서 하는 지 그 이유를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