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에서 이경규가 주도하는 몰래카메라가 방영됐다. 하프마라톤에 도전한다고 했다가 멤버들이 모두 빠지면서 양준혁만 완주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몰래카메라 자체는 성공했다. 하지만 상처뿐인 성공이었다. 차라리 실패하는 게 더 나았다.

이경규는 자타가 공인하는 몰래카메라의 상징적 인물이다. 이번 몰래카메라는 그가 여태까지 했던 몰래카메라 중에 최악의 허무 몰카가 될 것 같다. 그만큼 참가자도, 보는 사람도 씁쓸하게 하는 몰래카메라였다.

이경규의 애초 계획은 마라톤 초반에 멤버들에게 몰래카메라임을 알려주고 양준혁만 혼자 뛰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현장상황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다. 그래서 멤버들은 계속 뛰어야 했다. 이때 이경규가 당황하는 모습까지는 재미있었다.

차라리 그때 몰래카메라의 실패를 인정하고 마라톤 도전을 공식화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랬으면 마라톤에 도전한 멤버들은 성취감을 느끼고, 약삭빠르게 신입 골려주기 몰래카메라를 기획한 이경규만 망신당하는 구도가 됐을 것이다.


이경규가 망신당하는 구도는 재밌다. 그가 절대 강자이기 때문이다. 망신당한다고 해도 그가 실제로 무슨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시청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 몰래카메라계(?)의 대부격인 그가 마침내 몰래카메라에 실패한다는 내용도 <남자의 자격>에 상당히 도움 되는 이슈였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장 위대하고 순수한 의지의 표상인 마라톤. 그것을 이용해 장난질을 치려던 이경규가 무너지고, <남자의 자격> 멤버들의 열정이 잔꾀를 뛰어넘는다는 구도.

하지만 이경규와 제작진은 계속 몰래카메라를 성공시키는 데에만 집착했고, 이미 15킬로미터 내외를 달리고 있던 이정진, 김국진, 윤형빈의 도전을 강제로 포기시키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그들은 대단히 아쉬워했는데, 시청자 입장에서도 결코 유쾌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 세 명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도전하고 있었다. 시청자가 <남자의 자격>에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열정이지, 열정을 강제로 꺾는 장난질이 아니다. 몰래카메라에 대한 집착이 프로그램의 본질을 망가뜨린 것이다.

게다가 이윤석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후여서 더욱 아쉬웠다. 사람이 그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가벼운 마음으로 웃을 수 있단 말인가?


마라톤이라는 종목 자체가 관절이 약한 사람의 몸에 지나치게 큰 피해를 입히는 운동이라 몰래카메라로 더욱 적절치 않았다. 몰래카메라를 보며 시청자가 부담없이 웃으려면 약간 골탕 먹는 사람은 있어도 큰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마라톤은 그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양준혁은 발바닥, 발목, 무릎이 모두 안 좋은 상태 같았다. 그런 사람은 마라톤을 하면 안 된다. 병원에서도 관절이 안 좋은 사람에게는 걷기나 자전거, 수영 정도를 권한다. 장거리 달리기는 위험 종목이다. 장난칠 만한 소재가 아니었다.

과거에 이경규는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뮤직비디오를 찍는다고 속여 하루종일 괴상한 분장으로 촬영 시키는 몰래카메라를 한 적이 있었다. 재미도 없고 꽤 허무했던 몰래카메라로 기억되는데, 그래도 그때는 등장인물 중의 누구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이번처럼 열정이 강제로 꺾이는 것 같은 설정도 없었다. 그때보다 이번이 훨씬 허무하다.

애초에 기획 자체에 무리가 있었고, 또 앞에서 지적했듯이 현장에서 방향을 수정했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끝까지 몰래카메라에 집착함으로서 감동과 재미 그 어느 것도 주지 못하는 최악의 허무 몰래카메라가 탄생한 것이다.

앞으로 사람 열정 가지고 장난치거나, 신체에 피해를 주는 몰래카메라가 있어선 안 된다. 그야말로 전파낭비였다. 모두 만신창이가 됐는데 이경규 혼자 몰카 성공을 자축하는 방송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경규가 <남자의 자격>으로 국민MC가 된 것은 괴로움을 주는 캐릭터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캐릭터로 전환했기 때문이었다. 그 의미를 놓쳐선 안 된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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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진 않았지만
    정작 프로그램 본래의 취지가 사라지고 말았군요.
    늘 보지만 시청자의 눈높이를 무시하는 예능이 많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