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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한예슬 파문, 무엇을 말해야 하나


미니시리즈 <스파이 명월>에 출연중인 한예슬이 돌연 촬영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 때문에 파문이 일었었다. 주연배우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돌출행동을 한 것은 초유의 사태이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이와 관련해 방송사와 제작사를 중심으로 한예슬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폭로가 많이 나왔다. 그 외에도 PD와의 불화설이라든가, 재력가와의 결혼설이라든가, 온갖 소문들이 흘러나왔다.

제3자의 입장에서 사태의 정확한 원인을 알 길은 없다. 그리고 꼭 정확한 사태의 내막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누가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캐봐야 결국 호기심만 충족될 뿐이다. 보다 중요한 건 이 사태를 통해 우리가 사회적으로 논의할 만한 지점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번 한예슬 파문에서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바로 한국의 고질적인 '쪽대본-생방송' 드라마 제작관행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한예슬은 그 전에도 제작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한 적이 있었고, 미국에 가서도 인터뷰에서 "모든 걸 내려놨습니다. 드라마 환경이 너무 힘들었습니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한예슬의 극단적인 행동을 초래한 원인 중에 드라마 제작관행의 문제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제작환경이 아닌 원인으로 갈등이 발생했다 해도, 그리고 어느 한 쪽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 해도, 만약 드라마 제작 스케줄에 여유가 있었다면 이렇게 순식간에 사태가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한예슬이 촬영을 거부하자마자 곧바로 드라마 결방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얼마나 제작일정이 촉박하면 배우가 한 번 사고 쳤다고 방송이 멈춘단 말인가? <아테나> 때도 정우성이 부상으로 하루 쉬었을 뿐인데 드라마 결방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생방송' 드라마의 문제다.

만약에 사전제작 시스템이었다면, 촬영 중에 배우가 펑크를 내도 전혀 이슈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제작환경에선 문제를 봉합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리고 애초에 감정적인 문제가 그리 크게 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생방송' 제작관행은 관련자들에게 살인적인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작은 갈등도 크게 자랄 수 있고, 순간적으로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들 수도 있다.

지금처럼 '쪽대본 생방송' 제작관행이 이어진다면 앞으로 무슨 돌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적인 잘잘못이나 연기자의 인성을 따지는 것보다 드라마 제작관행의 문제를 돌아볼 계기로 삼는 것이 한예슬 파문에 대한 적절한 접근법으로 보인다.


- 위험천만 드라마 제작관행 -

얼마 전에 <무사 백동수>에 출연하는 유승호와 <넌 내게 반했어>에 출연하는 박신혜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이것도 촉박한 제작일정에 맞추려 무리하게 움직이다 당한 사고라는 게 중론이다.

<싸인>에서 마지막 회에 오디오가 오락가락하다가 아예 정적이 흐르는가 하면 심지어 화면조정용 칼라바가 뜬 적도 있었다. <아이리스> 마지막 회는 방영되는 당일 저녁에 작업을 시작해, 방송시간 직전에야 가까스로 편집을 마쳤다. 이병헌이 저격당하는 장면에 문제가 있었지만 그냥 방영됐다. <최고의 사랑>도 마지막 회가 방영된 당일까지 촬영이 이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작품은 일단 전반부부터 방송을 내보내놓고 그 사이에 후반부를 작업하기도 한다. 방송을 한 후에 후반작업을 다시 해서 완성도를 높이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결국 우리 시청자들은 임시로 편집해놓은 드라마를 보고 있는 셈이다.

<아이리스>에선 툭하면 등장하는 회상장면이 빈축을 샀었다. 지나치게 무리한 일정 때문에 결국 제작진이 회상장면으로 드라마를 '땜질'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사극의 경우, 초반 전투씬은 웅장하고 완성도가 높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촉박한 시간 때문에 구성이 엉성해진다는 지적도 많다. 후반으로 갈수록 엉성해지는 구성은 현대극도 물론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미니시리즈가 중반 이후에 치밀함이 와해된다.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의 질을 따진다는 건 한가한 소리다. 작가도, PD도, 배우도 초인적인 속도전을 벌인다. 심도 깊은 작품구상이나, 깊이 있는 작품분석은 점점 힘들어진다. 배우 신구는 요즘 촉박해지는 드라마 제작관행 때문에 대본 연습이 사라져갈 지경이라고 했다. <욕망의 불꽃>이 끝난 후엔 조민기가 쪽대본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프레지던트>에선 최수종이 대본이 너무 늦게 나와 대사 외우기가 힘들 정도라고 했다. 형편이 이러한데 어떻게 작품의 질이 나아질 수 있을까?

링거투혼, 부상투혼이 일상화된 살인적 스케줄 때문에 1급 배우들은 드라마를 한사코 피하려고 한다. 드라마가 끝난 후의 인터뷰를 보면, 작품에 대한 내용은 없고 '자고 싶다, 너무 힘들었다'는 말이 주류를 이룬다. <싸인> PD가 중도하차를 선언할 당시 그는, '이러다가 내가 죽겠구나'라는 공포심을 느꼈다고 했다.

생방송 드라마의 또 다른 문제는 작품의 완결성이 떨어져도 너무 심하게 떨어진다는 데 있다. <미스 리플리>에서 김정태는 전반부와 후반부에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같은 드라마의 캐릭터라고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에덴의 동쪽>에선 러브라인의 구도가 바뀌면서 이다해가 중도하차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류의 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을까?

- 제작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

근본적으로 일주일에 드라마 두 편을 만들어 내보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 시간 정도의 이야기를 정성껏 일주일간 영상물로 만들어도 생명이 단축되는 것 같은 극한의 피로를 느낀다. 그걸 어떻게 매주 두 편씩 여러 달을 한단 말인가? 주말드라마는 몇몇 가정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나마 상황이 괜찮지만, 온갖 곳에서 현지촬영을 하며 다채로운 화면구성을 하는 미니시리즈의 경우는 지금까지 버텨온 게 기적이다.

선택을 해야 한다. 이대로 일주일에 두 편씩 드라마를 방영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충분한 분량을 만들어놔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제작과 방영을 병행하려면 일주일에 한 편만 작업해야 한다. 그게 우리 드라마의 경쟁력을 유지할 최소한의 방안이다.

언제까지 배우들이 드라마 중반 이후에 시청자가 민망할 정도로 초췌해지는 모습을 봐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한류의 스타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예슬 인성 분석이 아니라, 우리 제작시스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