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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브레인, 신하균을 사랑하는 불행한 시대

KBS 월화드라마 <브레인>이 조용한 상승세다. 시청률은 10%대 초반이지만, 그런 시청률로는 설명이 안 되는 팬덤 현상이 인터넷에서 나타나고 있다. 주연인 신하균의 이름을 빗대 '하균신', '하균앓이' 등의 신조어도 나타났다. 일부 팬들이 월요일과 화요일을 '브요일'이라고까지 할 정도다.

의사포털 '닥플'이 지난 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의학드라마 속에서 가장 의사 같은 연기자'를 뽑는 설문조사를 실시했었다. 결과는 <하얀거탑>의 김명민이 47% 지지로 1위였다. 이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하얀거탑>은 한국 드라마가 이룩한 금자탑중 하나다. 그 작품의 주연이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건 당연하다. 놀라운 건 2위였다. 바로 <브레인>의 신하균이 33% 지지로 2위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방영됐던 그 수많은 의학드라마 중에서 <브레인>이 그토록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이것을 단지 배우 개인의 연기력 차원으로만은 볼 수 없다. 웬만한 의학드라마 주연들의 연기력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이었다. 작품의 임팩트가 강하기 때문에 배우도 빛이 났다고 봐야 한다.

인터넷에서의 반응으로만 보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는 <뿌리 깊은 나무>이고 그 다음이 <브레인>이다. 월화의 넷심은 <브레인>쪽으로 기울고, 수목의 넷심은 <뿌리 깊은 나무>가 장악한 셈이다. 네티즌은 <브레인>에게서 무엇을 봤길래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것일까?

- 네티즌이 꽂힌 나쁜 의사 -

이 작품의 초반은 '나쁜 의사' 신하균이 출세를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후배들 위에서 권위적으로 군림하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오만으로 남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을 승진시켜줄 신경외과 과장에게만 충성하는 캐릭터였다. 네티즌은 바로 그런 캐릭터에게 꽂혔다.

처음 1,2회 방영 당시 신하균의 그런 모습만 나왔을 때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수많은 의학드라마들에 하나가 추가됐을 뿐이라고만 여겼다. 상황이 반전된 건 3회부터였다.

3회부터 신하균의 눈물겨운 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실력으로 모두를 무시하며 신경외과 과장 밑에서 '1인지하 만인지상'의 탄탄한 지위를 누리는 것 같았던 신하균은, 알고 보니 정말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과장 이상으로 영향력을 행사는 정진영이 신하균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신하균이 무시했던 실력미달의 동료는 알고 보니 그 병원 고참 의사의 자식이었다. 든든한 백을 가진 것이다. 신하균에게 조교수 자리를 줄 것 같았던 과장은 그 고참 의사와 술을 한 잔 하더니, 그 실력미달의 동료를 조교수로 임용했다.

논문까지 대신 써서 바쳐가며 충성했던 신하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실력은 그가 월등하지만 배경이 없는 신하균을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힘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신하균에게 냉혹하다. 게다가 신하균은 집안마저도 어렵다. 어머니의 사채빚을 자신이 대신 짊어져야 하는 신세다. 사방에서 신하균의 목을 조여온다.

그가 출세를 위해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린 것은,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확보하고, 자신의 자부심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노력해, 감히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쌓았다. 그 실력으로,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되려 했다. 평생 남에게 굽실거리며 사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이다. 그 상처 때문에 그는 자존심에 집착하고 출세만 아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전쟁을 치르듯이 분투를 이어간다. 이것이 88만원 세대 네티즌에게 공감을 끌어냈다. 거대한 기득권 카르텔에 대한 생존투쟁이야말로 이 시대 청춘들의 화두가 아니던가! 이래서 시청률 수치와 상관없이, 네티즌의 뜨거운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 <하얀거탑>보다는 약하다 -

이것은 <하얀거탑>과도 비슷한 구도다. <하얀거탑>도 어느 가진 것 없는 의사의 출세 분투기였다. 당시 네티즌은 주인공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네티즌의 좌절감은 여전한 셈이다.

하지만 <브레인>은 아직 <하얀거탑>의 반열에 올라서지는 못했다. <하얀거탑>의 경우는 주연인 김명민 뿐만 아니라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과장을 비롯해, 병원장이라든가 그 외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분명한 존재감을 보여줬었다. 그것이 작품의 박진감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브레인>의 초반은 신하균의 원맨쇼였다. 신하균 이외엔 뚜렷하게 부각되는 인물이 없다. 그에 따라 신하균의 분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게는 되는데, 그 이상의 박진감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뿌리 깊은 나무>에선 주요 등장인물들이 서로 눈을 마주보고 있기만 해도 모종의 힘이 느껴졌다. 바로 그런 것이 작품의 박력이다. <브레인>은 아직 그런 힘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네티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폭넓게 상승하지 못하는 이유다.

- 나쁜 의사에게 열광하는 불행한 시대 -

<하얀거탑>부터 <브레인>에 이르기까지, 젊은 사람들이 나쁜 의사에게 열광하는 우리 시대는 얼마나 불행한가? <하얀거탑>이 방영될 당시 사람들은 이선균에게 화를 냈었다. 그가 그 작품에서 유일하게 '착한' 사람이었다. 이선균 이외엔 모두가 악당이었고, 부정불의가 판을 쳤다. 그런 지옥도에서 '착하게 살라'고 김명민을 압박하는 이선균을 모두가 비난했다.

모두가 악한데, 힘을 가진 놈이 더 악한데, 왜 아무 가진 것 없는 나에게만 착하라고 하는가? 저들이 먼저 룰을 어기는데, 왜 내가 룰을 지켜야 하나? 내가 저들 이상의 진짜 실력을 길러낸 이상, 형식상의 반칙 좀 해도 되는 것 아닌가? 다들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젊은 네티즌이 <하얀거탑>에선 반칙하는 김명민을 지지했고, <브레인>에선 신하균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브레인> 초반부에선 착한 의사 캐릭터인 정진영이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신하균이 정진영을 통렬하게 비웃을 때 네티즌은 통쾌해했다.

착하라는 건, 이 비정한 세상에서 물정모르는 태평한 소리라고 여겨진다. 당장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젊은이들을 그런 절박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 이 시대는 그런 불신 분노가 흐르는 불행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