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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광해 천만사태, 왜 특별한 사건일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사건이다. 한국 영화 역사상 이런 일이 없었다. 보통 한국 영화의 경우, 관객이 200만 정도만 넘어도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조명 받는다. 300만을 돌파하면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격상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건축학개론>이 300만 관객을 돌파하던 당시에 수많은 매체가 <건축학개론> 현상을 부각시켰었다. 그러다가 700만 정도를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난리’가 난다.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 자체에 홍보 효과가 있어서, 그 보도를 본 사람들이 뒤늦게 영화를 찾으며 천만 관객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전 인구가 오천만 수준인 나라에서 천만 관객이라는 것은 정말 이상한 사태다. 언론이 하나의 붐으로 만들지 않으면 천만 명이 영화 한 편을 보러 극장에 간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광해>의 천만 관객이 특이한 사건인 것은, 이런 식의 관심이 전혀 없었는 데도 영화 혼자서 조용히 천만의 신화를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용한 흥행은 지금까지 없었다. 싸이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 언론 문화부의 역량이 싸이 사태에 집중됐기 때문에 <광해>는 철저히 소외됐다. 또 김기덕 감독의 베니스 수상 이후에 언론의 프레임이 ‘블록버스터 대 소형영화’로 굳어지면서, <광해>는 대기업의 스크린 독점 사례 정도로나 치부됐다. 그런 상황에서 순전히 관객들이 이 영화를 밀어올렸다. 바로 여기에 ‘광해 천만 사태’의 특별함이 있다.

 

이 영화는 지금 극장을 많이 찾는 2040 세대가 원하는 지점을 정확히 타격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이토록 뜨겁게 반응한 것이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스크린 독점으로 이런 흥행을 만들 순 없다. 또, 단지 영화가 재미있어서 되는 흥행이라면 천만 관객을 돌파하기 힘들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한국은 인구가 오천만 수준인 작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해>는 거대한 스케일의 시각효과나 자극적인 오락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도 아니다. 잔잔한 드라마형 사극일 뿐인데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나타난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건 앞에서 말했듯이 <광해>가 대중의 욕망을 표현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를 통해 현재 대중이 원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관객들은 지금 <광해> 관람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그 메시지를 읽어내면 2040 세대의 열망을 알 수 있다. 그 열망이란 무얼까?

 

 

 

 

- ‘이런 지도자를 원한다!‘ -

 

<광해>는 어느 천민이 임금의 대역을 하며 진짜 임금다운 임금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그 천민이 궁중에 들어갔을 때 대신들은 대동법으로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에 대동법이 뭔지도 몰랐던 천민 광해는 이내 그 본질을 파악하고 대신들에게 이런 식으로 호통친다.

 

‘땅을 많이 가진 이에게 많은 세금을 걷고 적게 가진 이에게 적은 세금을 걷는 것이 왜 나쁘다는 말인가!’

 

바로 이 설정이 엄청나게 벌어진 자산양극화에 절망하고 분노했던 2040 세대의 심장을 울렸다. 영화 속에서 자산가를 대변하는 대신들은 광해의 정책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진짜 광해는 대신들의 저항 때문에 일을 추진하지 못하지만, 천민 광해는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여기에 관객들이 환호한 것이다.

 

이것이 국내정치라면 대외관계의 문제도 있다. <광해> 속에서 조선은 명청교체기를 맞이한다. 대신들은 임진왜란 당시 ‘재조지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명나라만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천민 광해는 내 나라 내 백성을 지켜야 한다며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한다. 우리도 최근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헤게모니 변환기를 맞이했다. 당분간은 미국과 중국이 각축을 벌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철저히 국익을 중심으로 한 영리하고 유연한 외교가 필요하다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다.

 

<광해>에선 또, 이병헌의 캐릭터가 절묘했다. 그동안 이병헌은 멋있고 무게 잡는 역할들을 주로 보여줬었는데 여기서는 완전히 망가진다. 천민 출신의 무게 잡지 않는 왕. 이것은 서민의 설움을 잘 이해하고, 권위주의에서 탈피한 지도자를 떠올리게 했다.

 

<광해>에서 천민 광해는 단 한 사람의 생명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한다느니,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따로 있다느니, 이런 생각들을 모두 일축해버린다. 이 영화에선 왕족과 하급 궁녀와 호위 무사의 생명이 모두 소중하다. 천민 광해는 그들 모두를 위해 눈물 흘린다. 요즘은 인간보다 경제적 이익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양극화가 세습 구조로 심화되면서 사람의 가치에도 차등이 생기고 있다. <광해>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소중하며, 그 누구도 가벼이 희생돼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광해>의 천만 흥행을 통해, 바로 이런 것들이 2040 세대의 열망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2040 세대는 지금 내부적으론 양극화 문제를 해소해줄 정책, 대외적으론 국익 중심의 자주적이고 유연한 외교정책, 그리고 서민의 마음을 헤아리며 국민 한 명 한 명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지도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광해>의 흥행은 제발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 달라는 대중의 아우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대선국면에 터진 국민의 열망 -

 

올해 영화 트렌드는 사회적 분위기로 시작했지만 이내 복고 멜로 열풍으로 바뀌었다. <건축학개론>과 함께 복고열풍, ‘국민첫사랑’ 수지 신드롬이 시작된 것이다. <내 아내의 모든 것>도 멜로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다 성인영화가 흐름을 형성했고, 최근엔 강간 신드롬과 함께 범죄 영화가 화제로 떠올랐다.

 

물론 올 여름에 가장 큰 화제는 <도둑들>의 천만 돌파였다. 이 영화는 그 이전 천만 영화들과 달리 아무런 사회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천만 관객 돌파라는 특별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대중의 사회적 열망을 표현해야 한다는 공식을 깬 것이다. 이것이 <강남스타일> 돌풍과 맞물려 B급 전성시대라는 진단이 회자됐다. 대중이 더 이상 무거운 의미를 원하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도둑들>이 나오기 전까지 관객들은 가벼운 재미에 굶주려 있었다. 반 년 이상 무겁거나 잔잔한 영화들만 봐왔던 것이다. 배트맨 시리즈로 대표되는 헐리우드 액션 영화들도 요즘엔 대단히 무거웠다. 그 답답함이 <도둑들>에서 터졌다. 또, <도둑들>은 우리가 만든 헐리우드 수준의 오락 대작이라는 특징이 있다. 한국은 세계적인 수준의 컨텐츠를 만들어내면 거국적 열광이 발생하는 나라다. 최근에 <강남스타일> 열풍을 봐도 이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올해엔 대선이 있다. 대선이 있는 해에 복고, 멜로, 19금, 범죄물, B급 오락에만 탐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이상함이 극에 달했을 때 <광해>가 나타났다. 언론은 미처 주목하지 못했지만, 관객은 <광해>를 알아봤다. 바로 이 영화가 자신들의 정치적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요즘 전반적으로 자극적이고 가벼운 재미가 득세하는 트렌드인 건 맞지만, 역시 대선의 힘은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