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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허트 로커, 지옥에 중독된 미국

 

지난 주말 EBS에서 방영된 ‘허트 로커’의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는, ‘터미네이터’, ‘아바타’ 등을 만든 제임스 카메론의 전 부인으로 유명했었다. 그랬던 것이 ‘허트 로커’ 이후부터 ‘누구의 부인’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럴 정도로 ‘허트 로커’의 존재감이 컸다는 이야기다.

 

캐서린 비글로우와 제임스 카메론은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허트 로커’와 ‘아바타’로 경쟁했는데 결과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6개 부문을 휩쓴 캐서린 비글로우의 완승이었다. 최근 그녀는 ‘빈라덴 암살작전 : 제로 다크 서티’로 다시금 미국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70년대 베트남전 영화를 대표했던 감독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라면, 21세기 이라크전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캐서린 비글로우가 자리매김할 기세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또 여자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능가하는 파워풀한 연출로도 유명했다. ‘폭풍속으로’가 그녀의 능력을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이런 그녀의 특징은 ‘허트 로커’에도 그대로 나타나, 직접 군대를 체험한 남자가 만든 작품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전쟁영화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폭탄제거반의 이야기다. 영화에 그리 대단한 스토리나 사건은 없다. 그저 날마다 반복되는 폭탄과 관계된 일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끝없이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캐서린 비글로우의 연출력이라고 하겠다. 주요 등장인물이 세 명밖에 없고, 대규모 전투장면이 없는 저예산 영화인데도 정말 실감나는 전쟁영화라는 인상을 준다. 감탄할 만한 연출력이다. 내가 아마 감독이었다면 질투했을 것이다.

 

영화는 ‘전쟁은 마약이다’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군인이다. 그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오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끝없이 전장에 가려 한다. 이것은 끝없이 전쟁하는 나라, 미국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여진다.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반복되는 미국 총기 사건의 이유로 지목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의 호전성이었다. 미국은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전쟁 때문에 엄청난 재정적자의 압박을 받고 있지만 끊임없이 타국을 압박하고 군비를 늘려간다. ‘허트 로커’는 전쟁중독자의 위태롭고 공허한 삶을 보여준다. 전쟁을 극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마치 실제 전투 한복판에서 어느 종군기자가 찍어낸 다큐멘터리 영상 같다. 동시에 군인들이 느끼는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심리도 담아낸다. 폭발이나 총격 장면도 대단히 사실적이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실제 전쟁의 느낌을 주기 위해 CG의 도움을 거부하고, 진짜 폭약을 고집했다고 한다. 최근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되고 화려한 폭발 장면 대신, 정말 그럴 법한 폭발 장면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에서 미군은 적진 한 가운데에 고립된 소규모 주둔군이라는 느낌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위험에 직면하고, 주위에선 적대적인 시선이 쏟아진다. 누가 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모두가 테러범인 것 같다. 길거리에 수시로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폭탄제거반은 계속해서 생명을 걸고 폭탄을 없애가야 한다. 그 폭탄을 누가 설치했는지는 모른다. 벌판에 나서면 누군가가 총을 쏘아댄다. 어디서, 누가, 왜, 쏘는지도 모른다. 그저 위험할 뿐이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인 ‘에반겔리온’을 보는 느낌이다. 끊임없이 하늘에서 위험요소가 내려오는데, 어디서 왜 오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저 살기 위해 싸울 뿐이다. 위험과 살육이 반복되는 지옥의 한 복판. 그것이 전쟁이고, 이라크에서 미군이 처한 현실이다.

 

미국의 반전영화는 이런 식으로 전쟁을 지옥처럼 묘사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옥의 묵시록’도 이런 식이었다. ‘전쟁은 광기가 지배하는 살육의 카니발’이라는 관점이 ‘허트로커’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엔 가장 핵심적인 진실이 빠져있다. 이라크 전쟁은 원인 모를 카니발이 아니라, 바로 미국의 침략에 의해 벌어진 전쟁이고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렇게 가장 핵심적인 진실은 외면하고, 그저 전쟁이 지옥이라고만 묘사하는 게 미국 반전영화의 전통인 셈이다.

 

그래서 미국의 반전영화는 보수층에게도 환영받는다. 진보는 그런 영화를 보면서 ‘저 지옥 같은 전쟁을 그만 둬야 해’라고 생각하는 반면, 보수는 ‘우리 군사들을 저런 처지로 만든 반전주의자들을 처단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들이 미군을 수많은 적들 속에 고립된 처지로 그리기 때문에, 보수층은 ‘바로 저러니까 군비를 더 증강해서 적들을 모두 쓸어버려야 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허트 로커’는 이런 점에서, 미국의 진보와 보수가 모두 찬사를 보낼 만한 영화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많은 상을 휩쓸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영화 같지만, 다른 쪽으로 보면 민간인에게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다 바보처럼 죽어가는 미군의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 같다.

 

영화 속에서 민간인에게 발포를 주저한 병사 때문에 지휘관이 죽고, 그들을 친절하게 대한 군의관도 폭사한다. 이런 설정은 ‘민간인이고 뭐고 다 쓸어버려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미군이 저지르는 사고는 어쩔 수 없다’는 강경보수파의 인식을 강화한다. 반전영화 속에서조차 자국 중심적 사고방식을 버릴 수 없는 미국. ‘허트 로커’에선 그런 미국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