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관련된 영화하면 제일 먼저 짐 캐리의 <이터널 선샤인>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운 어느 커플의 이야기였다. 기억을 지우고 모르는 사람이 되어 만났지만 둘은 결국 다시 사랑에 빠지고 만다. 기억을 지우면 사람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말하자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그 사람을 다시 사랑한다는 건,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이 운명이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영화는 기억이라는 소재를 운명적 사랑과 연결 짓는다.

 

이정재, 장진영의 <오버 더 레인보우>도 그랬다. 이 작품에선 친구인 장진영을 짝사랑하던 이정재가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는다. 그래서 장진영과 함께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는 중에 다시 장진영을 사랑하게 된다. 영화는 이정재가 원래 사랑했던 사람이 장진영이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이정재와 관객이 동시에 원래부터 장진영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관객, 특히 여성 관객은 ‘운명적 사랑’이란 판타지를 만끽하며 행복감에 젖어든다.

 

<이터널 선샤인>과 <오버 더 레인보우>는 모두 마지막에 사라진 기억이 밝혀지며 충격을 주는데, 이렇게 주인공이 기억을 찾아가다가 마지막에 충격적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도 영화가 애호하는 구성이다.

 

대표적으로 <메멘토>를 들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부인을 살해한 원수를 찾아다닌다. 그러다 마지막에 범인이 바로 그 자신이란 사실이 드러나 관객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식스 센스>에서도 주인공이 귀신이란 사실이 마지막에 드러났다.

 

사라진 기억으로 인해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는 설정도 자주 등장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후크>에선 피터팬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고 평범한 중년 가장으로 사는 모습이 그려졌다. <토탈리콜>과 <본>시리즈에선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멧 데이먼이 자기자신의 정체를 찾아 헤맨다.

 

한편, 예술영화에선 기억의 모호함이 주로 표현된다.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을 세계적 거장으로 만든 <라쇼몽>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선 하나의 사건에 대한 주요 인물들의 서로 다른 기억이 표현됐다. 관객은 단일하고 명료한 이야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렇게 혼란스러운 구조는 대중흥행영화로는 사랑받지 못한다. 한국에선 홍상수 감독이 이런 방식의 표현을 대단히 애호한다. 홍 감독의 영화에서 하나의 사건이 서로 다른 디테일로 여러 번 표현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인데, 이런 배경을 모르는 일반 관객은 ‘역시 예술 영화는 난해해’하며 절망에 빠지게 된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지 서로 다른 기억들로 인한 현실의 모호함을 표현했을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단 하나뿐인 객관적 진실이라고 맹신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그 복잡한 전개 속에서 분명한 의미를 찾으려다가 혼란에 빠지지 말고, ‘저마다의 다양한 기억들을 쭉 펼쳐놓아서 현실의 모호함을 그린 것이구나’하고 대충 넘기면 된다.

 

사람은 잘 잊어버린다. 만약 망각이 없다면 사람은 대단히 고통스럽게 살게 될 우려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의 상처, 부끄러운 기억 등이 언제나 그 사람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각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망각이 있기 때문에 ‘죽네사네’하던 사람과 헤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이와 새출발도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도를 지나치면 곤란하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망각을 넘어서서 아예 인위적으로 기억을 지운다는 설정이었다. 나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우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현실도피에 불과했다. <메멘토>에선 자신이 부인을 죽였다는 기억을 지운 주인공이 평생을 지옥 속에서 살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셔터 아일랜드>에서도 부인을 죽인 주인공이 그 기억을 지우고 정신병자가 된다. <식스 센스>는 자신이 죽었다는 기억을 지운 주인공이 방황하는 이야기였다. 그게 어떤 것이든 자신의 기억을 인정하고, 직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우리는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초심을 잘 잊는다는 이야기다. <후크>에선 동심을 잃어버린 사람의 공허한 삶이 그려졌다. 때 묻기 전의 순수했던 마음과 왕성했던 호기심, 사회 초년병 시절의 열정적인 각오 등은 애써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편, 예술영화가 그려주는 다양한 기억들처럼 나의 기억, 나의 인식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시각을 인정하는 관용이 생겨날 수 있다.

 

이렇게 나의 기억을 그게 어떤 것이든 직시하고 인정하며, 과거의 초심과 열정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고, 나의 기억과 생각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인식 그래서 타인의 기억과 시각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때 우린 비로소 튼튼한 정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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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버티 2013.09.23 16:23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브루스 윌리스가 벽난로 앞에 잠들어 있는 아내를 아련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데 바닥으로 떨어져서 데구르르 구르는 링반지...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