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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황금의제국, 태주의 승리를 바랐던 이유

 

<황금의 제국>이 태주(고수)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최동성 회장이(박근형) 만든 세상에서 최동성의 상속자에게 이길 순 없었다는 게 태주의 마지막 말이었다. 물론 현실에선 그렇다. 현실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만이라도 태주가 최씨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고싶어했을 시청자들에겐 안타까운 파국이다.

 

불가능한 것에 도전했던 주인공이 점점 욕망의 포로가 되면서 마침내 그의 적과 같아지고, 결국 파멸하여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도식적인 결말도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그보다는 태주가 최서윤을 이기고, 혼자서 혹은 최서윤과(이요원) 둘이 함께 권좌에 오르는 결말을 기대했었다.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와 <황금의 제국>은 한국 사회의 심연을 탐구한 작품이었다. <추적자>는 정치권력의 싸움판을, <황금의 제국>은 자본권력의 싸움판을 그렸다. 두 작품 모두 권력을 쥐기 위해 그 싸움판의 핵심에 다가가면서 인간성이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렇게 인간성이 무너지는 이유는 권력의 작동방식이 인간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권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 작품은 한국 사회의 심연을 탐구한 작품이었다.

 

 

황금의 제국은 1차적으로 식탁이었다. 혈족으로 선택된 자들만 앉을 수 있는 식탁. 아무리 기업에서 중책을 맡고 있어도 그 식탁엔 앉을 수 없었다. 그 식탁에선 몇 조 원의 투자가 왔다갔다하고, 대규모 경영실패도 없던 일로 치부됐다. 태주는 정략결혼을 통해 그 식탁에 앉았다.

 

그 식탁은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되기 위해 패륜적 전쟁이 펼쳐지는 전장이다. 저마다 황금의 주인이 되려 싸운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들은 황금의 노예가 되어, 황금이 주입한 욕망의 대리전을 펼칠 뿐이다. 제 것이 아닌 욕망을 위해 영원히 피투성이 신세로 싸워야 할 운명. 그래서 그곳은 지옥이다.

 

인간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황금의 대리인일 뿐이다. 주체의 실종. 주체가 사라진 곳에 도덕성이나 인륜은 설 자리를 잃는다. 한때 ‘미사일 단추를 누르는 인간’을 증오했던 태주는, 결국 황금의 명령에 의해 미사일 단추를 누르는 인간이 되고 만다. 아무런 가책도 없이 황금의 자기증식욕망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괴물이 된 것이다.

 

태주는 그곳을 천국이라 믿는다. 이기기만 하면, 그래서 자신이 주인이 되기만 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일 거라고. 그곳에서 영원한 승리자가 될 거라고.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승리자의 자리에 가까워질수록 영원히 핏발 선 눈으로 황금을 위해 일해야 할 영겁의 저주에 짓눌릴 뿐이다. <황금의 제국>은 그런 풍경을 그려왔다.

 

바로 그래서 태주가 이기길 바랬다. 가슴이 뜨거웠던 한 청년이 황금의 제국의 권좌에 다가가며 심장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천국이라 믿는 지옥불 속에 앉아있는 음울한 광경. 태주가 이기면 이런 광경이 만들어진다. 이것이야말로 <황금의 제국>이 그려온 세계관에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까? 어떤 인간이라도 제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황금의 제국의 포식성 말이다.

 

태주가 최서윤과 함께 권좌에 앉는 구도도 괜찮다. 태주가 최서윤을 선택한다는 것은 윤설희로(장신영) 상징되는 인간성의 세계와 완전히 갈라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고 지옥불 속에서 최서윤과 함께 영원히 고독할 운명에 들어선다는 것. 이 또한 <황금의 제국>이 지금까지 그려온 세계관에 부합한다.

 

하지만 막판에 태주는 인간성을 택했다. 황금의 제국에 완전히 잡혀먹힐 뻔한 순간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바로 윤설희 때문이었다. 사랑이 태주를 구원한 셈이다. 황금의 제국보다 더 강한 사랑의 힘! 갑자기 구도가 너무 낭만적으로 흘러간다. <황금의 제국>이 지금까지 그려온 비정함과 어울리지 않는다. 좀 더 디테일하게 따지자면, 극중에서 사기나 마찬가지인 부동산 분양 사업으로 잔뼈가 굵은 윤설희가 막판에 갑자기 순수한 사랑의 여신으로 변신한 것도 공감하기 어려운 설정이었다.

 

물론 태주가 자멸하는 구도도 어느 정도 황금의 제국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다. 황금의 제국은 ‘모진 놈이 이기고 제일로 뻔뻔한 놈이 다 먹는 세상’이고 ‘한 놈이 다 먹는 판’이기 때문에, 연인을 버리지 못한 태주가 결국 떨려나가는 반면 주위 사람들을 모두 버린 절대 독종 최서윤만 승자가 된다는 설정. 그것을 통해 자본권력 싸움판의 비정함이 표현됐다.

 

하지만 이런 결론보다 태주가 이기는 것이 더 <황금의 제국>에 어울리는 것은, 그래야 주인공 태주가 진정으로 죽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황금의 제국>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자본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태주가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된다는 건, 결국 자기자신을 완전히 잃고 황금의 노예가 된다는 걸 뜻한다. 이것이 태주의 죽음이다. 하지만 막판에 태주는 인간이길 선택했고, 그에 따라 자본에서 인간으로 주인공이 바뀌었다. 비정한 자본 드라마에서 마지막에 휴먼 드라마로 급선회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결말이다.

 

그러나 <황금이 제국>은 요즘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수준으로 박진감 넘치는 전개를 보여줬다. 전편에 이어 권력의 심연을 탐구해들어가는 뚝심이 돋보인 수작이기도 했다. 박경수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