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공주>가 전국의 작가 지망생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개연성 있는 인물의 성격이나 치밀한 구조를 창조하기 위해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다. 그저 자극적이기만 하면 인물이 성격이 어떻든, 극의 구조가 어떻든, 되는 대로 막 써도 된다는 희망.

 

 

요즘엔 작가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드라마들이 많긴 하다. 예를 들어 <상속자들>은 부자 꽃미남과 가난한 불쌍녀를 엮어서 화사하게만 이끌어가면 극이 된다는 희망을 준다. <지성이면 감천>은 악녀와 착한 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희망을 준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오로라 공주>는 단연 압권이다. 이 작품을 보면 정말 ‘대본을 막 써도 지상파에서 편성이 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일관된 성격을 가진 인물을 창조할 필요가 전혀 없다. 구성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일단 내세우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쿨하게 바꾸든지 빼버리든지 하면 된다.

 

오로라가 출연했던 드라마의 피디는 처음에 최악의 인물로 등장했었다. 여배우한테 향응 받으려 하고, 촬영장에서 모두 굶고 있는데 혼자서만 육포를 오물오물 씹어대고, 잘 나가는 사람에겐 숙이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거만하고, 자기 자존심 건드리는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손찌검하는 등 그야말로 진상 중의 진상이었다.

 

 

그러다 오로라의 오빠들이 홀연히 사라지자, 오빠들 3명의 러브라인도 한꺼번에 사라졌고, 그에 따라 허전해진 극을 메워줄 새로운 러브라인이 필요해졌는데, 어찌 된 일인지 피디가 그 주인공으로 당첨됐다.

 

그러자 진상계의 끝판왕이었던 피디가 갑자기 마성의 훈남으로 변한다. 남주인공의 큰 누나, 여자 악역의 어머니(임예진), 분장실 실장 등 만나는 족족 피디에게 넘어가 3인분의 러브라인을 혼자 책임지게 된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에 어떤 개연성 제시도 없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변한다.

 

오로라의 오빠들은 처음에 철없는 재벌2세처럼 등장했는데, 오로라의 집안이 망한 후 갑자기 휴머니티가 넘치며 예의와 인의를 아는 중년남 캐릭터로 변한다. 이들이 처음부터 그런 성격이었다면 오로라네의 회사가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러브라인이 필요하면 막 엮어보다가 되면 밀어붙이고 안 되면 없던 일로 친다. 오빠들 하차 이후 중년 로맨스를 막 엮던 시절, 설설희의 아버지를 남주인공의 큰 누나와 엮으려 했었다. 설설희의 아버지는 그 전까지 가정적이고 진중한 캐릭터였는데, 한 순간에 흑심남으로 변했다. 그러다 큰누나 - 설설희 아버지 라인보다, 큰누나 - 드라마 피디 라인이 더 재미있다고 판단됐는지, 설설희 아버지는 어느 순간에 가정적인 진중남 캐릭터로 돌아왔다. 설설희 아버지의 라인이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없던 일이 된 것이다.

 

치밀하게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적당할 때 꿈이나 점을 동원하면 된다. 등장인물한테 꿈 한번 꾸게 하면 갑자기 결혼도 추진하게 되고, 임신도 하게 된다. 설득력 있는 대사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점괘가 그렇게 나왔다고 하면 등장인물이 그냥 납득한다.

 

 

재미를 고조시키기 위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등장인물을 사이코로 만들면 된다. 임예진의 딸은 처음에 부잣집 규수 신문기자 정도로 나왔는데, 오로라와 경쟁하는 순간부터 갑자기 사이코로 변해 극의 긴장도를 높였다. 그런 정도로 불안정한 성격의 소유자가 신문기자생활을 했을 리가 없는데, 어쨌든 오로라를 화끈하게 괴롭혀줄 악녀가 필요하니 그녀가 당첨됐던 것으로 보인다.

 

오로라의 결혼 후 남주인공의 누나들이 악녀 역할을 떠맡았다. 그녀들은 일반적인 시월드를 뛰어넘는 <미저리> 수준의 공포스런 히스테리를 보여준다. 남주인공은 명색이 작가란 사람이 집안에서 그런 공포스런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도 전혀 눈치를 못 챈다. 여주인공을 극단적으로 기구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성격이 극단적으로 폭주하는 것이다.

 

정말 대범한 작법이다. 인물 성격을 이랬다 저랬다, 러브라인을 떼었다가 붙였다가, 현실성이야 있건없건 마구 폭주시키기도 하고, 너무 대범해서 짜증까지 날 지경이다. 이런 드라마가 지상파에서 연장까지 되며 사랑받고 있으니 후배 작가들이 무얼 배우겠는가? 앞으로 더욱 대범한 드라마들이 넘쳐날까 무섭다.

 

 

 

Posted by 하재근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하하하 2013.10.29 15:29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참 공감이 가면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임성한표 드라마는 언제나 f학점입니다

    하지만 아예 아무생각없이 보면 임성한의 글빨?은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 헤헤...

  2. 가끔은 어이없어서 멍~~하니 보게됩니당. 점점더 알 수가 없어져요. 연장반대서명까지..ㅎㅎ

  3. 한 번 써봐 2013.11.13 09:09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그럼 당신이 한 번 드라마 써보시던가요.
    장담하는데 A4용지 한 줄도 못쓸겁니다.
    막장 막장 거리는데 안보면 되지. 왜 봅니까?
    다 봐놓고 까는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ㅋㅋㅋㅋㅋㅋ
    아니 그 전에 시청률로 모든걸 판단하는 한국 드라마 시스템의 폐혜라고는 생각 안해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