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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기황후의 대성공, 이완용 사극도 가능할까?

 

한때 한국 갤럽 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 1위, CJ E&M 콘텐츠 파워 지수 조사에서도 1위를 기록하며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기황후>가 마침내 마무리됐다. 시작하기 전부터 역사왜곡 논란으로 비난이 쏟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안방극장에서 왜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받은 것일까?

 

이 작품 이전에 사극은 주로 젊은층의 취향이 반영된 퓨전사극이었다. <기황후>는 초반에 아기자기한 퓨전사극과는 다른 큰 스케일의 서사적인 느낌으로 차별성을 만들었다. 원나라 황궁의 화려하고 장대한 이미지가 선보인 것도 주로 국내에 한정됐던 기존 사극과는 다른 시각적 차별성이었다. 공녀가 최상층까지 올라가는 자기계발 출세 스토리도 시청자를 끌어들였다.

 

장영철 작가는 이미 <대조영>에서 세력과 세력들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얽히면서 벌이는 수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전개하는 필력을 선보였었다. 그후에도 <자이언트>에서 다시 서사적인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뚝심을 선보였고, <샐러리맨 초한지>라든가 <돈의 화신>에서도 탁월한 이야기꾼의 능력을 확인시켜줬었다.

 

<기황후>도 마치 <대조영>처럼 여러 세력들의 이합집산과 음모를 쉴 틈 없이 전개해 시청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특히 중반부에 연철 대승상과 기황후의 대립이 압권이어서 연철 세력의 몰락 이후엔 극의 힘이 빠질 것으로 보였지만, 곧이어 백안과 바얀이라는 새로운 적을 내세워 긴장감을 이어갔고, 마지막엔 매박상단 수령의 모반이라는 카드로 끝까지 극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최측근 환관이 거대 상단 수령이라는 설정은 지나치게 말이 안 돼서 납득이 안 갔다. 하루종일 황제를 수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집단을 경영한단 말인가? 그래서 반전을 위한 반전 아니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런 카드를 동원해서라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필력은 놀라웠다. 마지막에 모반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학살하는 것은 대단원에 걸맞는 절묘한 설정이었다.

 

<기황후>의 중반부 인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전통적인 궁중치정사극의 구도였다. 궁중치정사극은 주부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장르로 왕을 사이에 둔 처첩들의 암투와 음모 등을 주로 다룬다. 이 작품은 여주인공이 원나라 황궁에 들어간 이후 본격적인 궁중치정사극 구도로 진입해서, 이 장르의 3종 세트라고 할 수 있는 ‘매질하기, 독약먹이기, 저주하기’ 등이 모두 동원됐다.

 

단순히 동원만 한 게 아니라 훨씬 자극성을 높였다. 전통적인 궁중치정사극이 회초리 정도로 때렸다면 이 작품에선 겉옷을 벗기고 온 몸에 채찍질을 가했다. 약먹이기도 태후가 황후에게 불임향을 맡게 하고, 황후는 모든 후궁들을 일렬로 세워 불임약을 먹이는 엽기적인 설정으로 그려졌다. 저주하기는 기존 치정사극에서 소박하게 짚인형 정도로 저주했다면 이 작품에선 그래픽을 동원한 블록버스터형 저주였다.

 

이렇게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궁중치정사극으로 높은 시청률은 올렸지만, 이런 구도로는 찬사까지 받기는 어려웠다. 마침 같은 시기에 치정의 요소가 전무한 상태에서 역사의 의미에 육박하는 <정도전>이 방영되어, 시청률은 <기황후> 찬사는 <정도전>으로 양분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이었던 셈이다.

 

시작하기 전부터 문제였던 역사왜곡 논란은 끝까지 <기황후>의 멍에가 됐다.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적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자체가 문제였다. 역적을 주인공 영웅으로 만들려니 억지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기황후>는 시종일관 여주인공을 고려와 고려인의 보호자인 것처럼 그렸다. 조금이라도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거부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마지막에 악역인 연병수를 처단하는 장소로 고려촌을 선택한 것도 실소를 자아냈다. 여주인공을 고려의 보호자로 그리기 위해 악인이 고려촌에서 고려인들에 의해 처단당한다는 설정을 동원한 것인데 이건 누가 봐도 무리수였다.

 

고려인들이 ‘연병수를 죽여라 원나라의 개 같은 놈’이라고 했는데, 기실 원나라의 주구는 기씨 집안과 그 배후인 기황후 아니었던가? 기황후는 죽어가는 연병수를 보며 ‘나라가 온전했다면 연병수 또한 고려에서 좋은 남편 좋은 아비가 됐을 겁니다. 저 모습 또한 보호받지 못한 불쌍한 고려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까’라고 했는데, 온전한 자주국을 만들려는 고려의 독립운동을 방해한 것은 기씨 집안이었다. 오죽하면 공민왕의 국권회복 첫 과제가 기씨 집안 척살이었겠는가. 이런 역사를 정반대로 윤색하자니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영웅이 필요하면 아예 판타지로 그리면 된다. 왜 굳이 역사를 바꿔가면서 사극을 만들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이런 식이면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을 조선의 수호자로 그리는 사극까지 가능할 것이다. 거대한 스토리를 뚝심있게 끌고 간 필력과 완성도는 별개로,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끝까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작품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