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드라마, 멜로를 빙자한 사회드라마였던 <밀회>가 끝났다. 이 작품은 한국드라마로서는 근래 보기 드문 성취를 이뤘다. 가히 음대판 <하얀 거탑>이라고 할 만하다. 김희애-유아인의 멜로라인만 아니었다면 한국 사회드라마의 금자탑이 되었을 것이지만, 멜로라인을 감안하고서라도 이 작품의 사회적 의미는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이 작품이 그려낸 건 상류층의 허위, 상류층의 실상이었다. 피라밋의 정점에 있는 최상류층의 추잡함과 그 정점 주위에 포진해있는 인물들의 비루함이 담담하게 묘사됐다. 오직 김희애만이 순수한 사랑을 통해 그 비루함에서 구원받는다는 설정이 구태의연했으나, 김희애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묘사는 정말 리얼해서 쾌감마저 느껴졌다.

 

특히 <밀회> 마지막회에서 재벌딸과 김희애의 남편과 재단이사장의 비서가 함께 술을 마시던 오피스텔에 재벌가 사위의 여동생이 등장하는 장면은 비굴함의 절정이었다. 김희애가 법률팀장인 재벌가 사위와 손잡고 쿠데타를 감행한 직후, 재벌가 사위가 가문의 헤게모니를 잡게 되고 그 동생인 음대 여교수가 신군부처럼 떠오르게 된다. 그녀가 오피스텔에 들어오자 김희애의 남편은 그녀를 벌떡 일어나 맞이한다. 동료교수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대학 동창인데도 불구하고 여교수는 비서에게 직접 말을 하지 않고 재벌딸에게 ‘이 친구는 왜?’라고 묻는다. 비서가 활짝 웃으며 ‘사석에서는 그냥 다 동기 친구 사이지 뭐’라고 하는데도, 여교수는 쳐다도 안 보고 김희애 남편에게 ‘목 마르다’라고 하고 그 남편은 벌떡 일어나 물을 가지러 간다. 그러자 비서는 아무 말 없이도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여교수 앞에 컵과 포크 등을 세팅하기 시작한다. 그리곤 여교수 앞에서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그녀가 술을 한 모금 넘길 때까지 대기한다. 여교수는 재벌 딸과 김희애의 남편을 볼 때의 미소를 지우고 사무적인 표정으로 비서에게 ‘땡큐’라고 한 마디 할 뿐이다.

 

같은 동기동창 지간이지만 재벌 딸 = 여교수, 김희애 남편, 비서로 이어지는 미묘한 서열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낸 장면이었다. 김희애의 남편은 잘 나가는 대학의 음대 교수로 사회지도층 인사라 할 수 있고, 비서도 재단 이사장을 보좌하는 커리어 우먼이다. 요즘 20대 대학생들이 선망할 법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자 앞에서 보이는 태도는 비굴함 그 자체였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사회의 민낯이다. ‘그들’이 우아함 뒤에 숨기고 있는 얼굴이란 뜻이다.

 

일반적인 드라마처럼 대놓고 설설 기는 설정이었으면 그렇게 인상 깊지 않았을 텐데, <밀회>는 이런 권력관계를 아주 점잖은 매너로 포장해 미묘한 뉘앙스로 그렸기 때문에 정말 리얼하다는 느낌을 줬다. 또 비루함과 상류층의 우아함이 충돌하면서 더욱 통렬하게 느껴지는 효과도 발생했다. 이런 묘사만으로도 <밀회>는 한국 최고 드라마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김희애의 포기는 아쉽다.

 

<하얀 거탑>은 상류층 의사가 되려는 서민의 분투기였다. <황금의 제국>은 상류층 재벌이 되려는 서민의 분투기였다. <밀회>에선 김희애가 상류층 예술계 인사가 되기 위해 분투했는데, 모든 작품에서 서민은 실패한다.

 

서민은 최상류층 주위에서 비굴하게 서빙하며 힘을 기르지만 언제나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한다. <하얀 거탑>에선 과장과 이사장의 비위를 맞추다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병으로 쓰러지고, <황금의 제국>에선 재벌 딸과 억지결혼생활을 하다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재벌 가문의 전 사회적 기득권에 무너지고, <밀회>에선 회장 딸의 폭언과 구타를 웃는 얼굴로 참아가며 서빙하다 반란을 일으키지만 사랑의 힘(?)에 그만 감옥행을 선택하고 만다.

 

<밀회>에선 회장 가족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회장 부인과 이사만 감옥에 가고, 회장 본인과 딸은 결국 사회에 남는다. 그들의 불법 증거가 검찰 손에 넘어갔다지만 그건 조용히 묻으면 그만이다. 결국 로열패밀리는 영원히 남고, 그 주위에 몰려든 서민출신들은 영원히 비굴하며, 이도저도 거부한 서민은 감옥에 가든 자살을 하든 비참한 길을 걷는다.

 

리얼하긴 하다. 하지만 이미 현실이 그렇게 암울한데 드라마도 언제나 이렇게 암울해야만 할까? <하얀 거탑> 때는 김명민을 응원했고, <황금의 제국> 때는 고수를 응원했고, <밀회>에선 김희애를 응원했는데 항상 결말은 실패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성공판타지를 그린다든지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설파하는 건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김희애가 탐욕을 버리고 감옥에 간 건 <밀회>로선 어쩔 수 없는 정답이었다고 하겠다. 아무튼, 오랫동안 기억될 만한 작품이 하나 나타났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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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인적으로 파격적인 결말을 기대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려, 선재가 오혜원을 차버리고 젊은 여자(첼로하는 학생) 에게 가버리는 결말 말이죠 ㅎㅎ
    이 드라마가 30~40대 여자들이 연상연하에 대한 로망을 갖고 보는 것 같은데. 마지막에 그 비현실적인 로망을 깨트려주는 거죠.
    한국드라마의 힘은 '막장' 이라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2. 전 개인적으로 1화부터 4화까지 열심히 보고선, 멜로라인에 집중할 수 없어서 안봤었어요 멜로드라마란 이름하에 재벌, 돈과 권력사이의 그 첨예한 신경전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보여준 것 같아요 말 그대로 막장드라마는 현실에서 벌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일텐데 요즘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일들이 벌어지는게 우리나라 현실 같네요 우리나라도 그렇고 해외드라마 영화도 그렇고 주인공은 착해야 하니까요. 물론 김희애가 물질적인 것을 택했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충격적인 결말로서 마이너스 피드백같은 교훈을 줬을 순 있겠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