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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축구는 왜 가장 사랑받는 종목이 됐을까

 

축구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인류에게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다. 월드컵이 국제적으로 올림픽을 능가하는 관심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축구의 인기가 그렇게 높지 않다. 하지만 월드컵만은 범국민적인 관심사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축구와 야구는 각각 영국과 미국에서 19세기 중반 경에 성립됐다. 당시는 영국이 세계 패권국으로서 오대양을 누빌 때였다. 반면에 미국은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국제적으로 고립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미국의 야구가 아닌 영국의 축구가 영국배를 타고 전 세계에 전파됐다.

 

우리나라에도 고종 19년인 1882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 호의 승무원들에 의해 축구가 들어왔다. 당시 상투머리에 한복을 입은 조선 백성과 영국 선원들이 축구를 했다고 한다. 그 직후 또다른 영국 군함 엥가운드 호가 상륙했고, 이 배의 승무원들은 서울에까지 들어와 축구를 선보이면서 공도 선물했다. 이 때문에 한국 축구는 영국핏줄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데, 사실 영국은 전 세계를 누비며 축구를 전파했기 때문에 세계 축구가 모두 영국핏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은 야구를 전파하겠다는 생각이 크지 않았다. 미국의 야구 리그는 처음부터 기업논리로 발전됐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사업기반을 다지는 데에 관심이 컸다. 해외 전파는 당장 이윤을 만들어주지 않아서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국의 야구사업자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자신들의 독점적 사업기반인 메이저리그를 확립하는 데에 주력했다. 시장이 완전히 포화상태에 달한 20세기 말 경에 이르러서나 해외진출에 힘을 쏟게 되고, 그래서 노모 히데오나 박찬호 같은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시장 확대의 사명(?)을 띠고 간택 받는다. 미국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까지 만들면서 야구 세계화에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축구로 기울어진 대세는 뒤집기 어려웠다. WBC를 만드는 과정도 그야말로 미국적이다. 축구에선 영국 사업자가 아닌 국제협회를 통해 국제대회가 열리지만, WBC는 메이저리그가 직접 주최했다. 미국 야구 사업자들의 독점을 향한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축구는 야구와는 달리 기업논리가 아닌 각 지역별 클럽 중심으로 발전됐다. 야구는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리그에서 몇몇 팀이 영원히 기득권을 누리지만, 축구 리그는 모든 클럽이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다. 워낙 클럽이 많다보니 결국 승강시스템이 도입됐다. 미국은 야구를 수익을 뽑아낼 창구로 인식했지만, 영국은 축구를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고 타국과 교류할 매개로 인식했다. 클럽도 해외교류에 적극적이었다. 결과는 축구의 세계화다.

 

 

 

 

- 축구와 본능 -

 

이런 외적인 조건과 더불어 축구 자체에 내재된 특징도 축구의 승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축구는 쉽고 준비물도 간단하다. 공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마저 없어도 만들면 그만이다. 1차 대전 당시 한 전선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이 즉석에서 공 대용품을 만들어 함께 축구를 즐겼다가 양측 수뇌부를 긴장시킨 적이 있을 정도로, 축구는 간단하게 즐길 수 있다. 한국전쟁 때도 유엔 참전군 사이에 간이 축구경기가 열렸었다. 글러브, 방망이 등 복잡한 준비물이 없어도 되고, 룰도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조건의 나라에 손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또, 그렇게 간단하기 때문에 축구는 가난한 나라라도 얼마든지 선진국을 이길 수 있는 스포츠다. 야구나 농구 등 다른 구기종목은 후진국이나 특정 인종의 대륙이 두각을 나타내기 매우 어렵다. 반면에 축구는 대규모 구기종목 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나라가 대등하게 겨룰 수 있고, 특히 식민지를 겪은 신생국들이 구 제국을 꺾을 수 있기 때문에 전지구적인 열광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축구는 본능에 부합한다. 쉽고 후진국도 참여할 수 있는 종목으로 권투도 있지만, 축구가 인류의 최대 관심사가 된 것은 여기에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원시 시대 때부터 인간은 각 부족별로 집단을 이루어 함께 전쟁을 해왔다. 그런 부족간 전쟁의 현대 대리물이 바로 축구다. 축구를 통해 인간은 부족의 위세를 과시하고 타 부족에 맞서 승리하려는 본능을 충족시킨다. 다른 종목들도 애국주의로 대중을 흥분시키지만 그중에서도 축구가 유별난 것은 바로 이런 대리전쟁이기 때문이다. 축구로 이겼을 때 가장 통쾌하고, 축구로 졌을 때 가장 열불이 난다.

 

그래서 축구는 폭력과 매우 밀접하다. 과거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사이에 축구경기를 계기로 실제 전쟁이 터진 적이 있을 정도다. 유럽은 오랫동안 축구팬들이 저지르는 폭력사태로 골머리를 앓았다. 중남미에서도 축구팬들 사이의 폭력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축구로 펼쳐지는 대리전쟁은 꼭 국가간의 일만이 아니다. 축구는 일종의 부족전쟁으로, 지역감정이나 계급대립도 첨예하게 표현한다. 예컨대, 스페인에선 마드리드를 포함한 카스티야 지역과 카탈루냐 지역 사이의 대립이 축구로 표현된다. 바로 그런 지역감정이 스페인 대표팀이 종종 실력이하의 졸전을 펼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에선 가난한 지역과 부유한 지역 사이의 계급대립이 축구경기로 터져 수십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 한국의 축구 -

 

그런데 한국의 축구는 차갑다. 한국은 야구를 즐기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중의 하나다. 동아시아의 한국, 일본, 그리고 대만. 중앙아메리카의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등이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야구가 번성한 건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가 원인으로 보인다. 일단 야구의 아기자기한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축구를 지루하게 여기게 됐다. 한국에선 지역감정도 축구가 아닌 야구와 결합해, 70년대에는 고교야구가 지역정서를 대변했고 80년대 이후엔 프로야구가 그 역할을 맡았다.

 

미국과의 특수관계가 형성되기 전까진 한국에서도 축구 열기가 뜨거웠다. 식민지 시절엔 서울팀과 평양팀의 경평전이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였다. 경평전이 열리는 날엔 평양 기생들까지 휴업할 정도였다. 당시 선수였던 김영근 등이 한국 최초의 대중스타로 불린다. 아녀자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설렜다고 한다. 경평전은 기호지역과 서북지역 사이의 지역감정이 분출되는 장이었고, 당시 축구경기엔 유럽처럼 폭력사태가 빈번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축구로 격돌하는 것도 열광적인 관심을 모았다.

 

한국전쟁 이후 축구에 대한 관심은 차츰 식어가지만 축구국제대회 열기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인에겐 ‘변방콤플렉스’와 함께 ‘국위선양열망’이 있다. 세계인에게 주목받는 축구대회야말로 변방콤플렉스를 떨치고 국위를 선양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월드컵은 뜨겁다. 민족의 한이 월드컵에서 분출된다. 축구가 외면 받는 나라에서 4년에 한 번씩 태극전사 신드롬이 터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