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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명량, 이순신이 영화에서도 이겼다

 

명량대첩은 기적이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단 13척의 전선으로 300백여 척으로 이루어진 대선단의 공세를 물리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여기엔 조선 수군 전력의 질적인 우위도 한몫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육군이 조총부대를 활용한 근대전을 했다면, 바다에선 조선 수군이 함포를 활용한 근대전을 펼쳤다. 그에 비하면 일본 수군은 직접 적선에 올라 백병전을 치르는 중세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함포를 만들 기술도, 함포를 장착할 만큼 튼튼한 배를 만들 기술도 없었다. 와중에 조선 판옥선은 왜군이 뛰어들기엔 너무 높았고 왜선보다 훨씬 튼튼했다. 따라서 바다에선 조선 수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명량에서 문제는 숫자였다. 아무리 ‘울트라 리스크’가 강해도 ‘저글링’이 떼로 덤비면 무섭다. 이순신을 제외한 선조 이하 조선 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까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선조는 해군을 아예 없애자고까지 했고,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명량에서 대장선을 놔둔 채 몇백여 미터 후방까지 도망쳤다.

 

이순신만은 ‘한 놈만 패자’ 전술을 믿었다. 과거 극진공수도의 최배달은 1 대 100으로 싸워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좁은 곳으로 가서 맨 앞에 나오는 한 놈만 계속 치면 된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좁은 명량에 일자진을 치고 맨 앞에 나오는 적선만 계속 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은 엄청난 숫자의 ‘저글링’에 겁을 집어먹었고, 결국 전투 초반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 혼자서 적의 선봉과 대적했다. 이때 어떻게 격침당하지 않았는지는 정말 미스터리다. 영화에서 민초들이 도와주는 것처럼 실제로도 백성이 배를 타고 나와, 대장선에 기어오르려는 왜군들에게 화살을 쏘아 대장선을 구해주기도 했다.

 

곧이어 이순신이 안위와 김응함의 배를 불러 호통 치며 함께 싸우도록 했다. 이 세 척이 분전하던 중 마침내 다른 배들까지 합세해 함포 세례를 날렸다. 결국 일본 선봉군은 완전히 붕괴됐고, 선봉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시신이 바다에 빠져있는 것을 항왜(항복한 왜군) 준사가 발견해 목을 잘라 돛대에 걸었다. 이 즈음에 조류가 바뀌었고, 조선 수군은 조류를 타고 진격해 일본 수군 2진까지 격멸했다. 그러자 본진이 퇴각하여 기적적인 승리가 완성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명량대첩의 실제 역사인데 영화는 이순신의 원맨쇼를 과장되게 그렸다.

 

명량대첩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도대체 일본 수군이 왜 퇴각했느냐이다. 이순신이 명량의 좁은 지형을 이용해 ‘한 놈만 패자’ 전술로 일본 선봉을 유린한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조류가 바뀐 후 거센 조류를 타고 밀려오는 달랑 13척의 배를 왜 막아내지 못했을까? 한국 전쟁 때 중공군이 그랬듯이 수적 우세를 이용해 에워싸면 그만이다. 아니면 조금만 후퇴해 넓은 바다에서 조선군의 물자가 다 떨어질 때까지 포위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일본 수군은 총사령관 도도까지 부상당하는 등 허둥대다 수많은 배를 잃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 미스터리를 풀 열쇠는 이순신이라는 상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군에게 이순신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는데 그것을 엄청난 수적 우세로 잠시나마 잊었다가, 조선군이 달랑 13척으로 선봉을 전멸시킨 후 포연을 헤치며 밀려오자 잊었던 공포가 되살아나며 공황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일본의 장수들은 다이묘였는데, 다이묘의 수급까지 잃었다는 건 정말 철저한 패배를 의미한다. 구루시마의 머리를 꽂고 달려드는 이순신이 지옥의 악귀처럼 보였을 것이다. ‘역시 이순신한텐 안돼, 역시 이순신한텐 안돼’ 이런 마음의 소리가 울리며 사지에 힘이 빠져 패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조선 대장이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일본군이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이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적이 우릴 가벼이 여기진 못할 것입니다’라고 상소를 올린 것을 보면, 그도 자신의 이름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았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명량대첩의 승리를 가능케 한 힘은 조선 수군의 하드웨어와 함께 이순신이라는 이름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순신’이라는 상징이 승리한 것이다.

 

 

 

영화 <명량>도 그렇다. 이 작품은 이렇다 할 스토리가 없다. 명량대첩이라는 전투에 집중할 뿐이다. 약간의 스토리가 있긴 하지만 무의미한 수준이다. 중간에 자폭선 에피소드를 통해 애절한 분위기를 만들려 하지만 과도한 작위성과 늘어짐으로 오히려 짜증을 유발한다. 외국인이 이 영화를 보면 감정이입을 그렇기 강하게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에겐 다르다. 한국인은 이미 이순신을 알고 있다. 마치 명량 바다에 나섰던 왜군이 이미 이순신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왜군은 이순신에게 공포를 느낄 준비가 되어있었고, 한국인은 이순신에게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영화적 완성도는 이미 문제가 아니다. 이순신의 위대한 고투를 거대한 스케일로 그려준 것만으로도 감격적이다.

 

명량바다에 조선 수군의 뛰어난 하드웨어가 있었다면, 영화 <명량>엔 한국 영화산업의 특수효과 하드웨어가 있다. 비록 전투의 전술적 전개가 세밀하게 표현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스케일로 거대한 해상 전투를 큰 무리 없이 그려냈다.

 

그런 바탕 위에 이순신이 등장하자 한국인으로선 감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의 내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관객 입장에선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이순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울컥하는 사람에겐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작품이다. 명량대첩에서처럼 영화 <명량>에서도 ‘이순신’이라는 상징이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