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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미생, 드라마 역사를 새로 쓰다

 

신드롬을 일으켰던 <미생>이 종영됐다. 미생은 완생이 되려는 88만원 세대 장그래의 이야기였다. 드라마 초반, 장그래가 꿈꾸는 완생이란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사원 명찰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 대열에 끼고 싶은 것뿐이다. 아침에 양복 입고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 끼고 싶은 것, 그들이 장그래를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 그 정도의 소박한 소망. 하지만 세상은 그 정도 소망조차 쉽게 들어줄 의사가 없었다.

 

장그래는 ‘그들’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그들로부터 ‘우리’라고 인정받기 위해 악전고투했다.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다. 이렇다 할 스펙도 뒷배경도 없는 그를 선뜻 우리라고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면접 오디션을 통과한 후에도 계약직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회사는 끊임없이 장그래에게 ‘우리’가 아님을 상기시켰다.

 

그런 장그래에게 이땅의 수많은 미생, 즉 88만원 세대가 열광했다. 같은 시기에 <내일도 칸타빌레>에서도 20대의 모습이 그려졌지만, 20대는 만화같은 설정보다 현실적 공감을 주는 <미생>을 선택했다.

 

그런데 극이 진행되면서 미생은 결코 20대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장그래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던 정규직의 ‘그들’도 결국 미생이었다. 대리부터 40대 과장, 차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불안 속에서 살았다.

 

제아무리 사람들이 선망하는 항공기 사무장 같은 ‘폼 나는’ 직장인이라도 이 사회의 갑 앞에선 결국 을 신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최근에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똑똑히 알려줬다. 극중 대사에서처럼 결국 ‘‘우린 모두 완생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미생>은 그런 현실을 담담하게 그렸고, 거기에 서민들의 폭발적인 공감이 나타났다.

 

과거 한국의 직장인 드라마는 이렇게 우울하지 않았었다. 물론 서민의 애환을 그리긴 했지만, 기본적인 정서는 낙관적이었다. 젊은이들을 그린 청춘드라마는 더욱 밝았다. 그러한 낙관성, 밝음이 외환위기 경제국치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20대 취업준비생, 30~40대 직장인할 것 없이 모두가 생존전쟁을 치르며 불안에 떨어야 하는 세상. 모두가 미생으로 전락한 시대. <미생>은 바로 그런 대한민국을 그렸다.

 

과거 <모래시계> 한 편이 SBS의 위상을 수직상승시키며 한국 방송시장에 지각변동을 불러왔다면, 이번엔 <미생>이 케이블TV의 위상을 수직상승시키며 드라마시장에 지각변동을 불러왔다. 바로 이런 점에서 <미생>은 한국 드라마 역사의 새 장을 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생>의 성공은 지상파 드라마의 제작관행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는 눈감고 오로지 신분상승 신데렐라나 막장 후계자 다툼, 사랑놀음의 배경으로만 직장 소재를 활용하던 관행에서, 보다 현실에 기반한 스토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는 뜻이다.

 

올 드라마중에선 <미생>, <정도전>, <밀회>, <개과천선> 등을 최고작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중에 두 편이 비지상파 방송사의 작품이다. 지상파 방송사가 독점하는 드라마 시장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생>은 바로 그런 변화를 상징하는 작품이었다. 내년엔 비지상파 방송사의 도전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과연 지금까지의 절대적 위상을 계속 지켜갈 수 있을까? 그것은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번 <미생>의 교훈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