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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세모녀 살인사건과 국제시장 정신의 실종

 

서울 서초동 아파트에서 남편이 부인과 두 딸을 살해한 사건이 충격을 주고 있다. 유명 사립대를 졸업하고 10억원대의 아파트와 외제차까지 소유한 중산층이 생활고를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에 관심이 커진다.

 

범인은 2012년에 실직한 후에도 두 딸에게 실직 사실을 감추고 대출로 매달 400만 원에 달하는 생활비를 쓰며 유복하게 생활해오다, 주식투자 실패 등으로 절망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3~5억원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히 파산지경이 된 것이 아님에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선 아무 가진 것 없는 형편에서도 악착같이 살아 가정을 지킨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쟁의 폐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은 윗세대의 피와 땀으로 오늘날의 경제번영을 이뤘다. 만약 우리 윗세대가 가난을 비관해 삶을 포기했다면 오늘의 한국이 가능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정신, 가족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내는 ‘국제시장 정신’이 과거엔 있었다. 최근 잇따르는 생활고 비관으로 인한 가족 살해 후 자살 사건들을 보면 그런 정신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 요즘 생활고라고 해봐야 과거 한국전쟁 직후의 처절한 가난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우린 너무 쉽게 비관하고, 너무 쉽게 포기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나약한 정신상태의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한국인이 비관하게 된 데에는 사회적 이유가 있다. 사회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이 문제를 각 개인의 나약함이나, 가장이 가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봉건적 사고방식 등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비극적인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문제가 풀린다.

 

과거엔 모두가 똑같이 가난했다. 그래서 가난으로 인한 불행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인간은 비교하는 동물이다. 다 똑같이 걸어다닐 땐 불행감을 덜 느끼지만, 자가용이 생겨도 남들이 더 좋은 차를 몬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양극화가 사회적 불행감의 근원이 된다.

 

우리사회의 더 큰 문제는 잘 사는 사람들이 못 사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풍조가 너무 심하다는 데 있다. 이런 구조에선 못 사는 사람들의 불행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고, 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추락에 대한 공포가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강남3구에서 유복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면 ‘루저’가 되는 것에 더 큰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아이들을 공적으로 키워주는 국가가 아니다.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아이가 장차 ‘을’의 신분으로 자라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사회는 을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이가 장차 멸시당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이야기다.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뜨려고 하는 것은 가족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봉건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이런 현실을 냉정히 인식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크다.

 

 

집안에 경제력이 있는 어른이 사라질 경우 남겨진 가족을 지켜줄 복지 안전망이 전무한 상황에서, 결국 혼자만 가느니 가족과 함께 가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양극화, 낙오자에 대한 멸시, 돈으로 사는 교육, 복지안전망의 부재 등이 한때 충만했던 ‘국제시장 정신’을 갉아먹은 것이다.

 

국제시장 정신이 펄펄 살아있던 때는 비록 당대는 가난하더라도 미래에는 더 잘 살 것이라는, 자식들은 더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반면에 지금은 자식의 미래에 희망을 갖는 국민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번 사건의 진상은 차차 밝혀지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최근 많아지는 가족 살해 후 자살 사건엔 이런 사회 구조의 문제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부분의 문제를 방치하고 개별사건이 벌어졌을 때 일을 저지른 개인만을 탓해봐야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사회가 군림하는 승자와 멸시받는 루저 집단으로 분리되는 추세를 반전시키지 못한다면, 가족의 미래를 비관하는 가장은 더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