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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슈틸리케 신드롬의 참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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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선전을 거두고 있는 한국대표팀에 대한 성원이 뜨겁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보여줬던 무기력한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기 때문에 이번 축구팀의 선전이 더욱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1무 2패 탈락 그러나 2015년 아시안컵 5전 전승 결승행, 이런 게 진짜 따봉이다’, ‘퐈이야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등등 네티즌은 지난 월드컵의 한을 이번에 풀고 있다.

 

특히 이 모든 변화를 이끈 리더인 슈틸리케 감독에 대해 열광적인 반응이 나타난다. ‘실학 축구 다산 슈틸리케’, 늪 축구 머드타카를 이끈 갓틸리케‘ 등 다양한 애칭도 등장했다.

 

히딩크 감독도 다시 회자된다.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을 발굴했듯이 슈틸리케 감독도 이정협을 발굴해 대표팀에 새바람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이정협은 국가대표는커녕 소속팀에서도 자리를 못 잡아 일찌감치 군대를 간 처지였다. 군대에서도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지는 못했었는데 슈틸리케는 그런 선수를 한국대표로 뽑았다.

 

 

이정협은 A매치 6경기 만에 3골 1도움이라는 믿기 어려운 활약을 펼치고 있다. 거의 세계 최정상급 수준의 골결정력이다. 그동안 문전에서의 답답함이 한국 축구의 고질병이었는데 이정협이 그 답답함을 날려줄 가능성을 선보였다. 물론 이정협의 경기력은 아직도 미숙한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간판 스트라이커로 성장할 가능성만큼은 분명히 확인시켜줬다.

 

사람들은 만약 슈틸리케 감독이 아니었다면 이정협이라는 선수가 알려질 수나 있었겠느냐고 묻는다. 유명 대학 위주의 연고주의, 간판주의, 파벌주의 속에서 지금까지 많은 유망주들이 스쳐지나갔고, 이정협도 그렇게 조용히 사라진 유망주 중의 한 명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자조한다.

 

지난 월드컵 당시 국민들이 홍명보 감독에게 그렇게 분노했던 이유도 홍 감독이 인맥과 명성 중심으로 대표팀을 구성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이런 축구계 분위기에서 과거 히딩크 감독은 강력한 ‘외부로부터의 충격’이었는데, 슈틸리케 감독이 2차 충격이 되고 있다.

 

히딩크 감독은 국내 시스템과 전혀 상관없는 깜짝 대표 발굴과 함께 수평적인 리더십도 선보였었다. 지나친 위계질서 때문에 대표팀 분위기가 경직됐다고 여겨, 선후배 사이에 서양식으로 이름을 부르게 한 것이다. 그것은 그라운드에서의 유연한 플레이로 이어졌고, 한국팀은 말로만 ‘원팀’이 아닌 진짜 ‘원팀’이 되었다. 슈틸리케 감독도 선수들과의 소통과 선수들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고 알려졌다.

 

 

모두 국내엔 부족한 가치들이다. 파벌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문제는 축구계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정치계를 비롯한 한국의 지도층 전반이 보여주는 리더십이 대체로 그렇다. 대통령이 바뀌면 새로 등장한 대통령의 동향이나 동창으로 주요 포스트가 일제히 바뀌는 나라에서 축구라고 다르겠는가. 홍명보의 의리축구처럼 고위층이 자신과 안면이 있은 사람들로만 인선을 하는 것도 문제다.

 

슈틸리케는 히딩크 감독에 이어 모처럼 ‘묻지마’ 실력주의를 선보였다. ‘묻지마’란 그 사람의 간판, 연고, 배경을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실력만 본다는 뜻이다. 여기에 뜨거운 반응이 나타나는 것인데, 결국 한국사회의 리더십 부재 상황은 외국인 지도자를 초빙해야만 해결되는 것일까?

 

이젠 ‘한국인 지도자는 안 된다’, ‘감독은 반드시 내부 연고가 없는 외국인으로만 해야 한다’는 냉소까지 나온다. 이렇게까지 우리사회 스스로의 리더십을 믿을 수 없게 된 현실이 참담하다. 공정하게 실력으로만 따지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 한국인은 이런 기본조차 지킬 능력이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