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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돌아온일지매 어정쩡한 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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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일지매 어정쩡한 설정이었다


뭐, 상업물이 아니라 작가주의 드라마라면 내레이션을 넣든 말든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상업 드라마에 내레이션을 넣을 땐 주의해야 한다. 내레이션은 드라마의 환상을 깰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환상이 지나치면 <꽃보다 남자>같은 막장 혹은 통속극이 되지만, 환상을 너무 깨도 상업 드라마로서의 매력이 약화된다. 드라마의 매력은 ‘몰입’에 있다. 몰입은 환상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환상을 넘어 노골적인 판타지로 지나친 몰입을 이끌어내는 막장 드라마는 시청자를 바보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너무 몰입을 거부하는 드라마도 흥취가 없다.


<돌아온 일지매>가 시작됐다. 지난 번 이준기의 <일지매>는 일지매의 디자인이 파격적이었다. 이번엔 다른 방식의 파격을 선보였다. 일지매가 현대의 빌딩숲 사이를 날았다. 일지매 손에 최신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내레이션이 문제였다. ‘책녀’라는 캐릭터가 계속 극에 개입했다. 주기적으로 등장해 목소리로 해설을 한 것이다.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유명해진 스타 성우 김상현의 목소리였다.


김상현은 다큐멘터리 해설을 많이 한다. 김상현의 목소리는 <돌아온 일지매>를 다큐드라마나 재현드라마처럼 느끼게 했다. 이러면 환상이 깨진다.


꼭 김상현이 아니어도 그렇다. 해설의 등장 자체가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다. 보통 사건의 진행은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그러니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해설해주는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드라마에서도 해설자가 없어야 그 화면 속 세상이 진짜 세상이라는 환상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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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환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 현실과 똑같은 느낌으로 연기를 하는 대가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로버트 드 니로,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폴 뉴먼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배역을 맡으면 그 인물의 일생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 속에서 표현해낸다. 마치 그런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이때 해설은 없다.


좌파 중에서 브레히트 같은 사람은 이런 식의 극에 반대했다. 그는 관객의 환상을 방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관객이 환상 속에서 극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그는 그들의 환상을 ‘깨는’ 장치들을 배치했다. 허술한 무대라든지 노골적인 1인다역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해설자가 등장한다. 연기도 로버트 드 니로처럼 진짜 그 인물이 되지 않고 ‘배우’의 느낌으로 하도록 했다.


이것을 통해 관객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촉구한 것이다. 관객에겐 수동적이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자의식과 지성이 낮은 사람일수록 그렇다. TV는 그런 관객의 특성을 확대강화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바보상자라 불린다. 막장드라마는 이런 바보상자적 특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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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영화는 재밌는데 유럽영화나 예술영화가 재미없는 것은 몰입도의 차이 때문이다. 헐리우드 영화는 철저히 환상과 몰입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술영화는 관객의 능동적인 감상을 요구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재미가 없다.


예술영화같은 드라마가 나오는 것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오락을 제공할 목적으로 만든 활극 블록버스터가 스스로 오락의 흐름을 끊는 건 이상하다. 예술을 하려면 예술을 하고, 오락을 하려면 오락을 제대로 하는 게 속 시원하지 않은가?


물론 오락을 제대로 하겠다고 막장으로 치닫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그래도 <돌아온 일지매>에 내레이션은 어울리지 않았다. 재미의 저하뿐만 아니라, 다큐 재현드라마같은 느낌으로 오히려 극의 가치도 떨어뜨렸다. 다큐 재현드라마는 싸구려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극에 사실성이 부여될 때 시청자들은 서서히 몰입한다. 그 몰입이 한 회 두 회 누적되면서 후반부의 폭발적인 감정이입이 가능해진다. 중간중간에 해설 같은 것으로 이 흐름을 깨면 폭발적인 감정이입은 없다.(여기서 말하는 사실성은 리얼리티가 아님. 스타워즈도 사실적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음)


<아내의 유혹>이 진행되면서 그때그때 다큐식 해설이 나왔다면 아줌마들이 넋을 잃고 TV 앞에 앉아있는 사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해설이 나올 때마다 감정이입이 깨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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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일지매>는 오락을 위한 활극이다. 잘 만든 활극은 그 자체로 미덕이 있다. 과거와 현대를 넘나드는 퓨전사극이라면 더 환영이다. 우리의 고전은 퓨전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여지가 아직도 풍부하다. 어떤 기사는 <돌아온 일지매>가 현대 서울에서 시작된 것을 비난하며 몰입을 방해했다고 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일지매가 현대에 오건 미래를 가건 몰입과는 상관이 없고, 과거와 현대의 접속을 통한 상상력의 확대는 환영할 일이다.


몰입을 방해하는 건 극 외부에서 끼어드는 목소리다. 이것이 <돌아온 일지매>를 오락물도 아니고 예술품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 처음엔 극의 소개를 위해서 그랬다고 치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부분에서부터라도 해설은 빼야 한다. 그래야 오락물로서 <돌아온 일지매>가 성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