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서점에 갔더니 옛날에 나왔던 연쇄살인 관련 서적과 사이코패스 책들이 좋은 자리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강호순 사건 이후 사이코패스 열풍이 불고 있다. 사이코패스라는 생소했던 단어는 불과 몇 년 만에 일상어가 됐다. 사이코패스 진단법이라는 것도 인터넷에서 빠르게 유포되고 있다.


사이코패스 공포증이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원래부터도 한국인은 스트레스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것이 과도한 열광이나 과도한 공포증으로 발현된다. 뭔가 자극적인 ‘꺼리’가 나타나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인의 삶에서 안전성이 파괴됐다. 이제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 성인은 언제 잘릴 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아이들은 더 위험하다. 1980년대까지는 학교에 자식을 무서워서 못 보내겠다는 부모가 없었다. 이젠 거의 모든 부모가 그런 스트레스 속에 있다.


동시에 경쟁의 강도도 격심해졌다. 경쟁강도가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래 최고조에 달했다. 그것은 울화증과 우울증을 초래한다. 다시 태어나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거나, 외국으로 이민가려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도대체 내 삶이 왜 이럴까? 아무도 모른다. 그저 답답하고 화가 날 뿐이다. 이럴 때 사이코패스라는 존재는 그 이유를 속 시원히 설명해준다. 알고 보니, 저 놈들이 문제였어. 저 놈들만 없으면. 저 놈들만 없으면. 그러면 좀 더 안전해질 텐데.


불안의 원인이 아주 단순한 형태로 적시되면 답답했던 속이 풀어진다. 복잡한 사회구조를 탐구하는 것은 답답한 속을 더 답답하게 한다. ‘한 놈’을 콕 찍어 ‘모든 것의 원인’으로 만드는 게 속 편하다.


한국인과 비슷한 스트레스 상태에 빠져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이 모든 것은 테러리스트 때문이야’라는 도식은 그래서 먹혀들었다. 미국인의 삶을 파괴한 것이 테러리스트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했다. 그저 자기들 스트레스의 원인을 테러리스트에게 돌리고, 집단공포의 편안한 품에 안기길 원했을 뿐이다.


사이코패스 열풍은 그런 심리를 닮았다. 범죄가 발생하는 사회적 원인을 탐구하진 않고, 사이코패스 낙인찍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하고 속 편한가. 이런 식의 단순한 원인 찾기는 ‘노무현탓’, ‘이명박탓’ 열풍에도 이어진다. 물론 이 두 대통령이 잘못한 것은 맞다. 그러나 민생파탄은 이 두 ‘개인’만의 탓이 아니다. ‘노조탓’, ‘전교조탓’도 이런 구조에 있다.


사이코패스 탓을 아무리 해도 범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노무현 탓·이명박 탓을 아무리 해도 한국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노조 탓·전교조 탓을 아무리 해도 경제와 교육은 정상화되지 않을 것이다. 대중이 이렇게 단순명쾌한 ‘탓탓탓’에 열광할수록 사회의 증오지수만 높아질 뿐이다.


- 개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


사이코패스는 정신병자로 간주된다. 두뇌구조가 비정상이라는 주장도 있고, 호르몬 분비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비정상’인 사람인 것이다. 또 사이코패스는 ‘절대로’ 치유할 수 없다는 주장이 대세다.


사이코패스가 정말로 그런 사람인지와는 별개로, 대중이 이런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이 문제다. 애초에 이상이 있고 치유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저지르는 악행은 온전히 그 사람 개인의 탓이 된다. 문제가 사회차원에서 개인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때 사회가 할 일은 그 개인을 ‘색출’해서 ‘박멸’하거나 ‘배제’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식의 담론이 공감을 얻을수록 점점 더 사회는 무서워진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무거워지고, 감시의 시선이 강해진다. 이렇게 경직될수록 점점 더 위험한 사회가 될 것이다.


학교폭력 사건이 터질 때마다 보다 강력한 처벌, 보다 치밀한 감시를 주문하는 여론이 나타난다. 그래서 학교폭력이 줄었는가? 아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은 20% 이상이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스트레스 상태에 빠져있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두고 아무리 처벌과 감시를 강화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아주 빠른 시간에 OECD 최고가 되었다. 사회는 황폐해졌다. 위험사회가 됐다. 사이코패스 열풍은 이런 황폐함과 위험함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 사회를 바꿀 수 없게 된다. 사회가 이대로라면 문제 있는 개인들은 계속해서 양산된다.


미국은 서북부유럽에 비해 살인사건율이나 범죄자 수감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미국에서 사이코패스가 많이 태어나서? 아니다. 미국은 양극화 사회고 서북부유럽은 복지사회다.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후천적으로 어떤 가정, 어떤 사회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범죄자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다.


누가 사이코패스인가, 사이코패스를 색출하기 위해 어떤 감별법이 필요한가를 연구할 시간에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그들이 발현되지 않을까’를 탐구하는 것이 진정 ‘안전한 사회‘로 가는 길이란 뜻이다.


그렇지 않고 사이코패스 낙인찍기에 함몰되면 결국 감시, 차별, 배제, 처벌 강화로 인해 사회 자체가 사이코패스화할 뿐이다. 범죄적 인성을 순화시키는 사회는 ‘관용적이고 따뜻한 사회’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른 개인을 추궁하는 대중심리는 불관용과 냉혹함으로 이어진다. 이야말로 사이코패스의 특징이다. 두뇌구조를 문제 삼으면 종국엔 정신개조설까지 등장할 것이다. 여기까지 가면 정말 무서운 사회가 된다.


물론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다. 그러나 성과급제 강화나 경쟁기조 등의 이슈엔 무관심하면서 귀족노조만 탓하고, 소득재분배 제도엔 무관심하면서 범죄자만 탓하는 이 증오의 폭주는 위험하다. 사이코패스 열풍은 증오할 대상을 하나 더 늘렸다. 이럴수록 ‘따뜻한 사회’와는 멀어진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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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이코패스, 사형제 등을 읽으면서 가정과 사회, 나라의 중요성을 한층 더 느낍니다.
    사이코패스 테스트가 유행이라 아이들이, 엄마도 질문에 답 하셔요~ 하데요.ㅡ.ㅡ/

  2. 사회가 그만큼 각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습니다.
    사이코패스의 전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에 대해 다룬 글 트랙백으로 남깁니다.

  3. 배용배 2009.02.12 11:09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범죄자 유전자를 데이타화 시켜서 범죄 예방을 한다는데..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다지 좋은 해결책은 아닌듯 싶습니다. 그렇다고 사형제 폐지도 함부로 주장 할수 없고..왜냐면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종교인이나 지식인 그 자신들이 그 범죄인을 제도 시키거나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할 자신이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결국은 사형제던 아니던 양면성이 있다는 점에서 판단 해야겠죠..만약 사형제를 실시 했는데 내 가족 중 한명이 욱하는 성질에 살인을 안 한다는 보장도 없고 사형제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누구에게 타살 되는 경우를 전제하고 생각 할 일입니다.

  4. 숲과나무 2009.02.12 11:11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함께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익히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학력차별, 경쟁교육, 입시지옥 한나라당 교육당국이 제시하고 있는 모든 정책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5. 학교다닐때 범죄학, 범죄심리학 시간에 느꼈던 겁니다만... 싸이코 패스니 뭐니 해봤자 결국에는 뚜렷한 실체가 없는 하나의 사회학적 모델에 불과합니다. 결코 특정될 수 없는 범죄자들을 그저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분류해놓고 "자 여기에 내가 새로운 이론을 세웠다" 고 잘난척하는 수준이라는 거죠. 개인적으로 싸이코패스 이론이나 혈액형 인간학 이론이나 도찐개찐이라고 생각합니다. 걍 이럴것이다는 식의 별 근거도 없고 어설픈 통계학적 지식으로 추려낸 사이비 학문임.

  6. 이런글 너무 좋아! 2009.02.12 15:30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근본을 보지 못하는 나한텐
    이런 글이 너무 와 닿내요 감사

  7. 유럽에서 2년정도 살아봤습니다.
    근데 괜히 다녀왔나봅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이곳을 떠나고싶습니다. 마음은 이미 떠나있다고 해야하나..
    당장 떠나지 못할 상황인데..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유럽사람들도 똑같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것같았습니다.
    다른게 있다면..

    주말에 가족들과 편히 쉬기위해 일을 하는 것과
    주중에 일을 하기위해 주말에 쉬는것의 차이정도?,,

    휴식을 즐기는 너무나 낙천적인 유럽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대한민국에도 따뜻한 봄이 오길 기다려봅니다..

  8. 서점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니,,

    하긴 우리나라 사람들이 뭔가에 잘 빠지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무심해지는 경향이 있긴 하죠.

    지금은 한창 빠지는 시기인가?

  9. 세상이 너무 편해져서 단순한 걸 좋아하나 봅니다. 깊이 생각하려는 건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죠.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Nobody 같은 거... 원더걸스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단순한 것을 추구하려는 게 지나쳐서 나타난 일종의 산물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