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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음악 칼럼

장자연리스트 공개 말도 안 된다

 

이른바 故 장자연리스트를 공개하라는 여론이 뜨겁다. 심지어 진중권마저 장자연리스트를 공개하라고 하고 있다. 현재 장자연리스트에 속해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면면을 상당히 고소해하는 투다.


진중권은 평소 네티즌의 집단행동, 집단공격을 싸잡아 집단주의, 대중파쇼 등으로 몰아붙이며 다수로부터 당하는 개인을 지켜왔던 사람이다. 그랬던 사람이 이번에 보이는 태도는 실망스럽다.


장자연리스트는 고 장자연 씨가 썼다고 알려진 문서에 적혀 있다는 사람들 이름을 말한다. 언론 보도에서 장자연리스트를 공개하라는 여론이 일고 있다는 것을 읽고 깜짝 놀랐는데, 그때까지는 문서라는 것에 대한 어떤 확증도 없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공론화 되자마자 그 문건의 내용을 모두 사실이라 믿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그 속에 ‘나쁜 자들’이라 거론된 이름이 공표된다고 생각해보라. 즉시 마녀사냥이 벌어질 것이다.


사람이 죽었고, 그가 썼다고 알려진 문서에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누군가가 생매장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사실일 개연성이 아주 높아 보이고, 그 명단도 진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세상엔 ‘만일’이라는 게 있다.


그 ‘만일‘ 때문에 민주공화국의 무죄추정원칙과 증거제일주의가 있는 것이다. 나쁜 짓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네 죄를 알렸다‘식으로 몰아붙이는 건 봉건시대에나 있었던 악습이다. 이런 악습으로부터 개인의 인권을 지킨다던 사람들이 왜 장자연리스트에선 ’일단 까고 보자‘라고 나오나?


- 알 권리 조급증은 무책임하다 -


강력범죄 용의자 얼굴공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그가 무죄로 밝혀질 경우 어떻게 할 거냐는 반문에, ‘무죄가 밝혀지면 그걸로 된 거죠’라는 식의 무책임한 행태를 보인다. 대중으로부터 ‘천하의 죽일놈‘으로 찍혀서 받을 피해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런 걸 ’알 권리‘란다.


진중권은 일단 공개한 다음에, 밥 먹고 술 먹은 게 다라고 밝혀지면 그만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도 ‘알 권리’란다. 용의자 얼굴공개에 주저하는 사람들은, 얼굴공개 자체가 이미 처벌의 효과가 있고, 유무죄를 가리는데 영향을 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공개한 다음 아님 말고’식은 무책임한 발상이다.


그런 식의 정보 공개로 만 명 중의 단 한 명이 피해를 본다 해도, 대중은 그 한 명의 피해를 무시하며 자신들의 ‘알 권리’를 향유할 권리가 없다. 그런 건 권리가 아니라 탐욕이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명단에 오른 것 같은 미운 사람을 망신주고 싶은 탐욕.


리스트를 공개하라는 여론이 일고 난 후, 필적 감정 결과 자필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보도가 나왔다. 적어도 본인이 직접 쓴 문서일 가능성은 매우 커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안에 적힌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단정하는 건 비약이다. 나도 바로 어제 밤에 연예뉴스 담당 PD와 작가를 만나 얘기를 들었는데, 그들도 문서 내용이 사실이라는 확증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 X-파일 사태와 다른 점 -


용의자 얼굴공개엔 대범한 사람들이 거꾸로 삼성 X-파일 공개엔 소심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난 과거에 X-파일에 대해선 공개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나도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X-파일은 당사자들끼리 대화한 내용이 그들도 모르는 새 밖으로 유출된 것이다. 때문에 그 문서의 내용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었다. 그리고 전 국민이 이해당사자인 사안이었다. 그런데 사법권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가 진실을 밝힐 의지를 보이지 않으므로, 명단을 공개해 국민적인 차원에서 진실을 드러낼 전기를 삼자는 의미에서 명단 공개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리스트는 단지 어떤 문서가 발견된 것에 불과하다.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이 대화한 내용이 유출된 것이 아니다. 문서 하나만 가지고 대중적 처벌이 일어날 것을 뻔히 알면서 명단을 공개할 순 없다.


만약 어느 보수 인사가 자살하면서, 진보정당 지도부, 진보언론 인사, 진보적 지식인 등이 줄줄이 혐오스러운 추문에 연관됐다는 문서를 남겼다고 치자. 경찰이 사실확인도 없이 다짜고짜 그 명단부터 공개한다고 나왔다면, 그러면서 ‘아님 말구요’했다면, 잘 한다고 박수 쳤을까?


경찰에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어느 정도 신빙성이 높아졌을 때, 혹은 경찰이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진실규명의 의지를 보이지 않을 때, 그때 명단 공개를 요구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한 대중의 감정으로 보아 명단에 속한 사람은 ‘처절한 응징’을 당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정도의 신중함도 없이 ‘빨리 까! 빨리 까!’만 외치는 것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