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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장서희 막장 책임론은 마녀사냥

 

장서희 막장 책임론은 마녀사냥

- 누가 여배우들을 탓하랴


최근에 장서희가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것에 대한 반작용인지 장서희를 추궁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장서희의 <아내의 유혹>이 대표적인 막장드라마이니만큼 장서희에게도 드라마 막장화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무릎팍 도사>에서 장서희는 자신들이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막장이라는 비난을 들어 속상하다고 했다. 열심히 하는 것과 가치판단을 혼동하는 것인데 이건 장서희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그맨 황현희도 비슷한 논리를 선보였었고, 현 정부와 고위공무원들도 이런 주장을 버젓이 한다.


심지어 일부 네티즌이나 기자들, 평자들, 제작자들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으므로 막장이 아니라 명품이라는 황당한 말까지 서슴없이 한다. 그런 세태에 비하면 장서희의 저 말이 그리 특이한 건 아니었다.


물론 책임 당사자가 저런 식으로 말하면 문제가 크다. 하지만 장서희는 책임 당사자가 아니다. 장서희는 배우일 뿐이다. 그중에서도 여배우다. 나이를 일정 정도 먹은 여배우의 선택에 대해 뭐라고 하기 힘들다.


금보라는 자신이 악다구니 치는 배역을 맡은 것에 대해 모멸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고 했다. 고고하게 살려면 연기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나이 먹은 여배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 중년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악독한 시어머니로 분하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황당한 시어머니 상에 대해 그 여배우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한 여배우는 자신의 극중 시어머니 캐릭터가 하도 짜증이 나, 실생활에선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도 연기자라는 직업을 유지하려면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인 것이다.


장서희는 로맨스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주변부 인물을 하게 된다. 불황으로 주변부 인물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젊은 스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다. 그렇게 어중간한 주변부 인물을 하다 나이가 차면 악독한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이 땅에서 여배우의 길이다.


장서희가 여배우로서 얼마나 위기감과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었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때 자신에게 익숙한 성공의 길을 선택함으로서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 한 것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누구라도 이렇게 할 것이다.


과연 장서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30대 말엽이 지나고 나서도 다양한 주연이 가능한 건 남성들만의 일이다. 최명길이나 전인화 같은 예는 대단히 특수한 케이스고 일반적으로 여배우에게 선택의 여지는 매우 좁다.


왜 그렇게 됐을까? 이것이 장서희의 탓일까? 혹은 여배우들의 탓일까?


아니다. 장서희라고, 여배우들이라고 왜 품위 있는 작품, 품위 있는 캐릭터를 싫어하겠는가. 도식적인 캐릭터 이외엔 출구가 다 막혀있는 시장상황의 문제다. 웰메이드 소리 듣는 드라마들이 판판이 깨져나가고, 그나마 그런 드라마들도 젊고 예쁜 여배우만 전면에 내세우는 상황에서 여배우들이 어쩌란 말인가?


도식적이고 노골적이고 극악스런 내용이 아니면 시청자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러면 드라마는 망하고, 회사도 망하고, 제작진은 생업이 막힌다. 당연히 시청자들을 만족시켜주는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배우들은 가장 수동적인 처지다. 그들은 기획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표현’하는 사람이지, ‘기획’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청자가 왕이고, 기획-제작자가 그 심부름꾼이고, 배우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시청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놓고 시청자가 배우를 탓한다. ‘야, 니들은 왜 만날 그것밖에 못하냐?’


이게 말이 되나? 그러라고 시킨 건 시청자다. 시청자가 30~40대 여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보다 다양한 드라마를 만들라고 시키면, 설사 여배우가 막장드라마에서 욕설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시청자가 채널 돌려버리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막장드라마를 찾으면서 막상 막장드라마 대령한 사람을 탓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방송사나 제작자는 시청자와 함께 세태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책임을 동시에 지는 것이 맞다. 비난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배우를 비난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선택의 여지가 극히 좁은 장년 여배우를 비난하는 것은 이상하다.


한국에서 장년 여배우들이 맡는 역할에 대해 누구보다도 불만이 큰 사람들은 바로 여배우들 자신일 것이다. 그들이 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길 원한다면, 그들을 책망할 것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이 가능한 시장상황부터 만들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시청자가 막장드라마의 책임을 여배우에게 묻는 것은 마녀사냥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