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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서울에서 동성애자가 춤추게 하라

 

수도권과 대기업은 한국 성장의 엔진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한국이 성장하기 위해선 일단 자원을 한 곳에 몰아줘야 했다. 그래서 초기의 자본축적을 이뤘다. 수도권은 그 과정에서 적어도 양적으로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중국이 달려오고 있다. 양적으로는 이제 게임이 안 된다. 서울이 공공기관과 행정기능과 청계고가를 내버려야 하는 것은 덩치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저렴한 노동력이 바글바글 모여 수출품을 만들어내던 청계피복공장식으론 서울은 미래가 없다. 서울은 이제 고부가가치의 첨단 도시로 도약해야 한다. 서울에서 세계 1급 서비스가 나오고, 세계 1급 기술이 나오고, 세계 1급 디자인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세계 1급 기업이 나와야 한다. 기술모방의 시대는 어차피 끝났다. 서울은 세계를 리드하는 창조적 에너지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서울의 미래다.


창조의 주체는 사람의 머리다. 이젠 머리의 시대다. 일사불란한 노동력의 집약은 끝났다. 이젠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도 없다. 결국 머리일 수밖에 없다. 서울 개발 2기의 생존전략, 도약전략의 핵심은 이거다.


“창조적인 1급 두뇌들을 어떻게 육성하고, 유지하고, 끌어들일 것인가.”


서울은 창조적인 두뇌들의 인큐베이터가 되어야 하고, 동시에 창조적인 두뇌들에게 매력적인 도시가 되어야 한다. 고급인력이 있는 곳엔 고급기업이 모인다. 기업이 모이면 그 일자리에 의해 다시 인력이 모인다. 그 인력을 보고 다시 기업이 모인다. 일자리와 인력풀의 선순환이 시작된다. 시시각각으로 이루어지는 대면접촉에 의해 정보가 교환되고 경쟁이 촉발된다. 생산성이 혁신되고 지식이 창조된다. 경쟁우위가 발생한다. 활력이 생긴다. 경제가 성장한다. 세계 최고 인재들이 모여 사는 고급 가치 생산의 용광로. 이것이 서울이 갈 길이다.


인재들을 기르는 것은 교육이다. 신기술이 개발되는 것은 R&D 역량이다. 그리고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도시가 되는 것은 문화환경 수준에 달렸다. 교육은 서울시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육은 국가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고등교육 예산의 대폭 증액과 대학무상평준화를 통한 고급 인재의 대대적 육성은 국가의 몫이다. 물론 시 차원에서도 교육인프라 확충에 예산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쏟아 부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안전한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안전한 도시는 계급갈등이 없는 도시다. 그건 양극화가 없는 도시를 말한다. 연쇄살인, 증오범죄,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폭력 등은 모두 양극화의 산물이다. 양극화는 도시를 불안하게 만든다.


창조적인 두뇌들은 삶의 질을 중시한다. 우린 과거에 삶의 질을 희생해서 개발 1기를 성공시켰다. 이젠 거꾸로다. 서울의 차기 도약 인프라는 삶의 질이다. 돈을 벌었으니까 이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청계천에 다시 물을 흘려야 했던 이유다.


쾌적한 환경은 창조적인 머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 점에서 서울은 지금 상당히 불리한 여건에 처해있다. 복잡하고 답답하기만 한 시내에선 창조성이 폭발하지 않는다. 수도권과 대기업은 대한민국 개발 1기의 성장엔진이었다. 그 엔진의 효율성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대한민국은 이제 신엔진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수도권 엔진을 업그레이드해 효율을 높여야 한다. 서울 환경과 삶의 질 향상은 구엔진 업그레이드의 핵심 전략이다.


- 어떻게 업그레이드할까? -


피츠버그는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최근엔 가장 성장이 둔한 지역에 속한다고 한다. 그리고 고급인재들이 외부로 유출된다고 한다. 피츠버그엔 인재들을 길러내는 대학들이 있었다. 미술관들도 있었다. 오페라, 발레, 교향악 공연장들도 있었다. R&D 연구소들도 있었다. 여가시설도 있었다. 도시 공원과 녹지공간도 풍부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발전하지 못했을까? 왜 인재들이 떠나갈까?


“문제는 근본적으로 문화와 태도에 있다.”


미국의 도시연구가 리처드 플로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피츠버그의 문화가 창조적인 두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소리다. 피츠버그는 민족 다양성을 뜻하는 도가니 지수에서 하위권이다. 게이 지수에서도 하위권이다. 예술인들이 많은 정도를 뜻하는 보헤미안 지수에서도 하위권이다.


반면에 미국에서 하이테크 산업이 발달한 10대 도시와 게이 지수가 높은 10대 도시 중 5개가 일치한다고 한다. 또 하이테크 산업이 발달한 10대 도시와 보헤미안(예술가) 지수가 높은 10대 도시 중 5개가 일치한다고 한다. 이것이 무얼 말하는가.


피츠버그의 문화가 타자에게 개방적이지도 않고, 약자에게 관용적이지도 않고, 다양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피츠버그엔 창조적인 머리들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도시를 다른 차원으로 도약시킬 마법의 T, 바로 관용(Tolerance)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피츠버그를 매력 없는 도시로 만들었다.


동성애자와 고부가가치의 첨단 산업이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건 아니다. 작가, 음악가, 공연예술인, 사진가 등의 보헤미안들과 첨단 산업도 당연히 관련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한 사회의 타자를 상징한다. 그들이 비집고 들어섬으로서 그 사회에 균열이 생기고 안정성이 파괴된다. 그리고 창조적인 에너지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런 타자를 흔쾌히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바로 그 사회의 개방성이고 관용이다. 관용이 도시를 숨 쉬게 한다. 관용이 도시 문화에 다양성이 꽃피게 한다. 관용이 도시를 자유롭게 한다. 관용이 도시를 매력적이게 한다. 창조적인 두뇌들은 그런 지역에 모여든다.


청계천재개발은 서울 성장 전략 1기의 종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피츠버그에도 강물은 흘렀다. 피츠버그에도 각종 도시개발 프로젝트들은 넘쳐났다. 하지만 그것은 백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관용적이지 않은 도시문화는 창조적인 머리들을 기르지도 품지도 못했다.


현재 추진되는 삶의 질, 서울 환경 개선 프로젝트는 딱 거기까지다. 잘 사는 사람(백인-중산층)들을 위한 환경미화인 것이다. 한국사회 주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노론이 나온다. 그 다음엔 친일파가 나온다. 그 다음엔 쿠데타 세력이 나온다. 그리고 지금은 수구냉전세력으로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를 검열하려 한다. 그들은 이미 정치적인 타자들을 아주 가볍게 몰살시켰던 전력이 있는 집단이다. 그들의 손에선 국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환경미화로 그 피냄새를 지우려 해도 역사는 잊어선 안 될 것들을 결코 잊지 않는 법이다. 그들이 만들고 지배하는 문화는 결코 매력적일 수 없다. 결코 즐거울 수 없다.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정권을 잡았던 역사는 보헤미안들의 잔혹사다. 그들은 용납을 모르는 집단이다.


청계천과 오페라하우스. 그들식 환경미화의 한계를 여기서 읽는다. 청계천은 물풀과 물고기가 약동하며 어우러질 수 없게 미끈한 인공수로를 만들어 물을 쏟아부었다. 오페라하우스에는 밑바닥에서 분출하는 문화적 역동성이 없다. 당연하다. 환경미화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헤미안(예술가)들과 각종 전문직 종사자들, 고급 연구자들 등 머리로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해내는 사람들을 통 털어 창조계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런 식의 담론은 또 다른 엘리트주의, 계급 분리로 갈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유효한 생각틀이다.)


서울은 창조계급들을 충분히 수용할 만큼 개방적인가? 관용이 넘치는가? 그것은 엘리트들에게만 높은 임금을 주고, 멋진 환경미화를 해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도시가 즐겁고 매력적이고, 안전하고, 편안해야 한다. 서울에서 문화가 펄펄 끓어야 한다. 서울은 약자와 타자에게 온정이 넘치는 도시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리더십이 중요하다. 도시가 불관용의 리더십으로 지배되면 그 도시의 문화는 불관용적으로 발전한다. 서울 전역에 걸친 뉴타운 삽질로 타자와 약자를 쫓아내거나, 용산에서처럼 폭력적으로 몰아붙이거나, 최근 문제가 되는 검열압박으로 예술인들을 억압하는 등 약자와 보헤미안 타자들을 밀어내는 것은 우리가 불관용적 리더십 경로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창조성을 말살해 경쟁력을 갉아먹을 것이다. 시골이었던 미국 오스틴이 하이테크 중심지로 거듭난 것에는 타자성에 관대한 문화도 한몫을 했다. 모든 종류의 약자와 타자에게 열린 도시, 열린 국가가 되어야 서울, 그리고 이 나라의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