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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한국축구, 숙적 버어마 제압?

 

1976년 1월 5일자 신문이다. 한국이 ‘숙적’ 버어마를 물리치고 킹스컵을 안았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로서 한국팀은 76년에 박스컵, 메르데카컵에 이어 킹스컵까지 손에 쥐어 아시아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고 기뻐하고 있다.


킹스컵.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생소하겠지만, 70~80년대만 해도 한국 청소년들의 피를 끓게 하는 단어였다. 아시아 축구대회로, 이 대회에선 언제나 한국, 말레이시아, 태국 등이 각축을 벌였었다. 수중전과 육탄전을 펼치며 사투를 벌이던 한국 대표팀의 선전 소식이 아직도 선하다.


지금은 대회로 치면 월드컵, 상대국으로 치면 구라파나 남미, 최소한 일본 정도는 돼야 국민들이 기뻐한다. 말레이시아, 태국 등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절엔 이 정도가 한국의 한계치였다.


 

기사를 보면 결승전에 한국대표팀은 ‘차범근’을 주축으로 공격진을 구성했다고 나온다. 그렇다. 바로 차범근이다. 차범근이 등장했다. 


차범근은 이 해, 1976년에 불멸의 신화를 쌓는다. 동대문 축구장에서 열린 박스컵 대회. 그곳에서 벌인 또 다른 ‘숙적’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에서다. 당시 한국대표팀은 직전 메르데카컵에서 말레이시아에게 패배한 상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을 걸고 서울에서 펼치는 설욕전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국은 전반전에만 세 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후반 종료 7분 전까지 1-4로 지고 있었다. 그때 차범근이 나타났다. 그는 남은 7분 동안 혼자서 세 골을 넣으며 한국의 영웅이 된다. 아쉽게도 당시 녹화 필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 그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차범근의 이 분전은 한국 축구사에서 신화가 됐다. 지금이야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누가 해트트릭을 기록한들 신화가 될 리 없지만, 후진국이었던 당시엔 그랬던 것이다.



이 기사는 76년 말에 열린 킹스컵에서 말레이시아에 패해 ‘4연패의 꿈’이 무산됐다는 내용이다. 당시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이 낙담했으리라.


아래는 그 패인을 분석하는 기사다. 아시아 2류 대회에서 진 것 가지고 ‘축구한국의 영광’이 사라졌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분석 내용이 재밌다.


- 팀웍 부조화

- 지도력 부족

- 고질적인 슛 부진

- 단조로운 공격패턴


이후 수십 년 간 듣게 될 말들이 여기 다 나온다. 이런 내용은 2002년 월드컵 때 처음으로 사라진다.


히딩크 감독은 파벌파괴, 능력주의로 팀웍과 지도력을 제고하고, 효과적인 공격패턴과 시원한 슛의 축구를 선사했다. 이때 한국인은 얼마나 열광했던지 전 세계가 놀랄 축제를 벌였다.


하지만 그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런 분석은 다시 한국축구를 질타하는 내용이 되고 있다. 2002년의 시원한 축구를 다시 보려면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까?


아무튼 옛 기사를 보니 아시아 2류 국가에서 세계 1.5류 국가로 도약한 지난 세월이 꿈만 같다. 이제 한국인에게 킹스컵 정도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2000년대에 킹스컵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나라는 북한이다. 2000년대 초반에 북한이 킹스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는 기사가 떴었다.


차범근을 신화로 만든 대회 박스컵. 현직 대통령의 이름을 딴 대회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2000년대의 권력자도 이런 일을 꿈꿀지 모른다. 스포츠 대회와 거기에서의 승리를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는 것. 베이징 올림픽에서 보인 중국의 무리한 과시욕이나, 한국 정부가 무리하게 연예인 응원단을 보내며 빈축을 산 것도 이런 심리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심리를 노골적으로 실현해 대통령 이름으로 2류 수준의 국제축구대회를 만들고, 거기에서 승리한 것이 신화가 됐던 역사.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수십 년 전에 이 땅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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