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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내조의여왕 ‘이죽일놈’의 명품질

 

기사들은 <내조의 여왕>에서 과도한 PPL 광고를 문제 삼고 있다. PPL이 과도했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PPL이 아닌 경우다. 돈 받고 광고하는 것은 제작비 조달의 차원에서 일정정도 필요한 일이지만, 돈도 받지 않고 거저 광고를 해줬다면 제작진의 양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내조의 여왕>에서 천지애가 자신이 직접 가방을 디자인해 파는 장면이 나왔다. 극중에서 그 가방은 호평을 받으며 비싼 가격에 팔렸다. 그 가방은 남편을 위한 ‘내조의 여왕’으로서 가정 안에 갇혀있던 천지애가, 자기 자신을 위한 ‘내조의 여왕’으로 자아가 해방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중요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가방이므로 시청자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난 순진하게도 그 가방이 창작품이거나 수수한 기성품일 거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램의 양식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다. 방영되고 나서 곧바로 기사가 떴다. 극중에서 김남주가 만들었다고 소개된 가방은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체사레 파조티’의 제품이며 가격은 150만 원대라고 한다.


갤러리아 명품관에 있던 제품들은 방송 직후 매진됐고, 이탈리아 본사에 추가 주문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죽 쒀서 개 준다더니, <내조의 여왕>을 향한 시청자의 사랑이 이탈리아 명품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주는 데로 전용된 것이다.


제작진에게 확인한 결과, 이 명품의 등장은 돈 받고 한 광고가 아니라고 한다. 제작진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즉, <내조의 여왕>이 공짜로 남의 나라 명품을 광고해주며, ‘된장녀‘들의 가슴에 명품병을 불 지르고, 강남 고급 상점의 매출을 올려주고, 이탈리아에 달러를 퍼다 바친 것이다. 한국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 때, 이탈리아 경제를 내조해준 <내조의 여왕>!



- 진짜 내조의 여왕에게 못을 박는 일 -


물론 제작진에게 그럴 의도는 없었다. 극중에서 천지애는 최고 수준의 감각을 가진 여자로 나오기 때문에, 아무 가방이나 그녀가 만들었다고 내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촉박한 제작일정에서 품질이 증명된 제품, 쉽게 빌려 쓸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작품에 몰두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공중파를 통해 온 국민에게 방영되는 드라마다. 자신들이 만드는 영상이 국민에게 미치게 될 영향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 점이 아쉽다.


해외 명품이 공중파 드라마의 소품으로 등장할 때 엄청난 광고효과를 거저 얻게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광고효과뿐만 아니라 명품을 사지 못할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도 안겨준다.


김남주는 극중에서 서민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녀는 ‘명품의 여왕’으로 알려질 만큼 명품을 많이 들고 다녔다. 김남주가 이혜영에게 무릎을 꿇고 비는 장면에서 그녀가 맨 가방은 미제 명품인데 방송 직후 품절 됐다고 한다. 이사 부인이 쇼핑할 때 따라다니며 맸던 가방도 명품인데 역시 품절 됐다고 한다.


이 외에도 윤상현과 시장에 갈 때, 선우선과 만날 때 김남주는 각각 다른 명품을 걸치고 있었으며, 이런 명품 현황은 방송 후에 곧바로 퍼져나갔다. 드라마가 명품을 생활필수품처럼 여기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이 땅의 수많은 진짜 내조의 여왕들에게 못을 박는 일이다.


한국의 주부들은 제 입으로 들어가는 사과 한 조각 아끼면서 가사를 돌본다. 아이 사교육비 가계부까지 작성하며 돈을 쪼개 쓰고, 아이가 크면 직접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아이 교육비를 조금이라도 보탠다. 명품이 필수품처럼 되면 서민 주부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 좀 더 세심한 주의를 -


기억나는 가장 아름다운 간접광고는 드라마 <불한당>에 나왔던 ‘태안회집’광고다. 당시 기름유출 사건으로 태안지역경제는 재난을 당했었다. 명절인데도 지역의 시장에 손님이 없었다. 그때 <불한당>은 드라마 속에서 지나가는 차에 ‘태안회집’이라는 광고문구를 붙여 태안경제를 도왔다.



바로 이런 세심함이 공중파 드라마엔 요청된다. 아무리 촉박한 제작일정이라도 전 국민에게 방영되는 것에 걸맞는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도 그렇고, 제작진도 그렇고 한국 드라마계엔 전반적으로 이런 문제의식이 빈약한 것 같다. 가난한 극중 캐릭터와 안 어울리는 명품의 등장이 종종 물의를 빚고 있다.


한국에는 해외 명품을 직접 만드는 중소기업이 있다. 그 회사가 만들고 해외 명품 상표만 나중에 붙는다. 그런 기업과 접촉해 그 기업의 자체 디자인 상품을 극중에서 홍보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이탈리아 명품업체가 아닌 한국의 중소기업이 혜택을 입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언플’로 홍보해도 좋다. 나도 환영하는 글을 쓸 용의가 있다.


배우는 자기 캐릭터가 무엇이 됐든 간에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데만 몰두하고, 제작팀은 고가외제품을 쓰는 데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다면 곤란하다.


한국 경제는 현재 두 가지 때문에 어렵다. 양극화와 산업위축이다. 이럴 때 해외 명품을 거저 홍보해주는 건 양극화를 부추기며 국내 산업을 더 위축시키는 일이다. 배우와 제작진의 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