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드라마 영상 칼럼

자명고 정려원 때문에 자멸하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 <자명고> 조기종영설이 기사화됐었다. 그러자 네티즌이 작품의 문제들을 거론했다. 그 안에 주연배우들 탓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정려원 책임론이 가장 크게 대두됐었다.


<자명고> 초기부터도 정려원, 정경호, 박민영 등의 젊은 배우들이 약하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됐었다. 뚜껑을 연 <자명고>는 결국 자멸로 흐르고 있는데, 정려원이 독박을 쓰고 있는 형국이다.


반면에 이미숙, 홍요섭 등 중견연기자들은 호평 받는다. 이 때문에도 더 정려원 등 젊은 배우들이 욕을 먹고 있다. ‘중견연기자들이 이렇게 잘해주는데 너희들이 어설퍼서 극이 망했다!‘ 이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실은 그 반대다. 중견연기자가 부각되는 것이 문제다. 작품이 왜 주연을 부각시키지 않고, 엉뚱하게 조연들을 부각시킨단 말인가? 이건 배우들 문제 이전에 작품 자체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 쓸데없이 자세하다 -


<자명고>는 쓸데없이 자세하다. 암투면 암투, 전투면 전투, 관계면 관계, 모든 부분에서 구구절절하다. 그러다보니 호흡이 아주 길다. 이렇게 자세한 묘사 때문에 오히려 명품이라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긴 하다. 하지만 너무 과한 디테일은 극의 속도감을 깎아먹는다.


물론 자세한 묘사가 좋을 때도 있다. <자명고>가 ‘쓸데없이’ 자세하다고 한 것은, 아무도 정려원, 정경호, 박민영이 나오는 퓨전 사극에 이런 디테일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디테일은 대하서사극에나 어울리는 것이다. <자명고>는 실제로 대하서사극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중앙집권과 호족분권의 대립, 고구려-낙랑-한 삼국간의 역학관계, 무역협상의 전개, 군신간의 의례 등이 철저히 묘사되고 있다. 이런 것을 통해 일개 부족연합의 수장이었던 만주의 고씨 집안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을 서사적으로 그려나간다.


또 인간 군상의 암투가 풍부하게 표현된다. 일단 고구려, 낙랑, 한이라는 세 나라가 갈리고, 그 안에서 다시 쪼개진다. 낙랑에서 발생한 은원관계는 한의 호족과 다시 관계를 맺고, 두 조각 세 조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각 나라의 호족들 내부에서조차 다시 미묘한 대립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왕홀-모양혜-가신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거론할 수 있겠다.


이런 대하서사극의 성격은 드라마 <자명고>에 무겁고 장중하고 진지한 특징을 부여한다. 이런 특징의 극을 잘 소화할 수 있는 건 중견배우들이다. 그러므로 <자명고>에서 중견배우들이 부각되는 건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극의 구도가 그렇게 짜인 것이다.


- 정려원에게 안 맞는 옷 -


정려원, 정경호, 박민영이 나오는 퓨전사극으로 누가 이런 드라마를 기대했겠나? 우동 한 그릇 먹자고 실내포차에 들어갔는데 난 데 없는 풀코스정식이 나온 판이다.


이건 젊은 청춘스타에게 안 맞는 옷이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정려원 등이 우스꽝스럽게 서있는 것이다. 이게 그들의 탓인가? 아니다. 극 자체가 잘못됐다.


청춘스타들을 데려다 낭만적인 로맨스의 퓨전사극을 보여줄 것같은 구도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대하서사극을 뒤집어 씌웠기 때문에 이도 저도 다 실패하고 있다. 대하서사극으로 가자니 청춘스타들이 발목을 잡고, 경쾌한 퓨전사극으로 가자니 대하서사극이 파토를 놓는 형국이다.


게다가 드라마 초기 아역 배우들의 기록적인 무매력이 극의 초반 활력을 다 잡아먹어버렸다. 거부감까지 줬던 아역들의 이상한 캐릭터와 생각보다 진지하고 비장한 어른들의 캐릭터는 ‘어 이건 이상한데’라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느낌 속으로 젊은 배우들이 어색하게 등장했다.


- 자멸하지 않으려면 대하서사극을 버려라 -


더 비참한 건 대하서사극이 워낙 장중하고 디테일하다보니 낭만적이고 애절한 로맨스마저 다 잡아먹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가 후자를 압박하는 구도에서 청춘스타들은 할 일이 없다. 이러니 젊은 배우들이 붕 떠 보이는 것이다.


이제 와서 배우들을 모두 갈아치우고 구도를 완전히 새로 짤 수도 없다. 그건 <자명고>라는 드라마가 절대로 대하서사극으로 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우동을 기대했다가 정식이 나왔어도, 제대로 된 것이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어설픈 정식은 죽도 밥도 아닐 뿐이다. 현재 구도상 <자명고>는 죽도 밥도 아닌 대하서사극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비장하고 장중하게 열연하는 중견연기자들이 부담스러워 보일 만큼.


이미 트렌디 스타들을 극의 핵심에 배치한 이상, <자명고>의 살 길은 ‘단순한 구도의, 낭만적인 로맨스가 있는 퓨전 사극’으로 가는 것뿐이다. 무거움과 복잡함을 줄이고, 단순함과 로맨스를 늘려야 한다. 현재의 <자명고>에선 로맨스의 환상이 아닌 모략의 냄새만 느껴진다. 이러면 어둡다. 어두우면 트렌디 스타들은 죽는다.


조기종영설이 나올 정도로 무참한 실패작이다. 현재 시청률이 10%조차 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절대 대중적이라 할 수 없는 어두운 드라마인 <남자이야기>에조차 밀리는 형편이다. 지금까지의 구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젊은 배우들을 자멸시키지 않으려면 앞으로라도 구도를 바꿔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