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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베라 사태, 한국언론 치부가 적나라하게

 

호떡집에 불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국 언론들은 ‘베라 떡밥’을 덥석 물었다.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중인 베라에 대한 기사들이 줄을 잇는다. 외국인들에게 과도하게 민감한 한국의 특성상, 또다시 여론이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편집장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어떤 네티즌이 베라가 쓴 책의 내용이라면서 몇 가지 자극적인 문장들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것 때문에 게시판이 시끌시끌해졌다. 기자가 그것을 보고 좋은 건수라고 보고해왔다. 그럼 어떻게 할까?


두 말할 것도 없이 ‘킬’이다. 도대체 책의 내용도 모르면서 어떻게 책을 비판할 수 있나? 앞뒤 자르고, 문맥 무시하고, 몇 가지 문장만 빼내서 비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이 사안은 네티즌이 감정적으로 폭발할 것이 100% 확실한 일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기사보다 훨씬 신중해야 마땅하다.


자극적인 문장들을 기사화해봐야 사태의 이해와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증오댓글만 초래할 뿐이다. 그러므로 첫째, 책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이므로 사실관계도 불분명하고, 둘째, 기사를 통해 소모적인 분란만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기사화할 일이 아닌 것이다.


게시판에서의 논란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면 기사화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할 일은 두 가지다. 일단 베라의 책에 의혹이 있어 논란이 벌어졌다는 간단한 사실전달 보도를 하고, 곧바로 그 책의 내용을 파악하도록 취재지시를 한다. 그렇게 해서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논조를 결정한 다음 심층보도를 한다.


이게 정상 아닌가?



- 한국 언론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


우리 언론은 언제나 그렇듯이 반대로 갔다. 극히 예민한 이슈이고 불분명한 사안이므로 신중해야 마땅한데, 정반대로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즉각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 여러분 베라가 호박씨를 깠답니다! 베라가 한국을 욕한답니다! 제2의 미즈노가 나타났습니다! 돌을 던지세요!’


예민한 이슈라는 데에서 신중할 필요를 느낀 것이 아니라, 그 선정성에 혹한 것 같다. 아래의 기사 제목들은 2009년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베라 한국사회 비판 서적 출간.."한국인들은.."

베라 '한국비하' 대체 왜? 제2의 미즈노 등극하나

'두 얼굴' 베라, 네티즌 “제2의 미즈노” 분노

'미수다' 베라, 독일에서 한국 '뒷담화'하는 책 펴내, 네티즌 '분노'

"한국 사랑할 필요없다"…'미수다' 베라, 한국 폄훼 논란

'미수다' 베라, 韓지하철 보면 쥐가 떠오른다구?


베라가 한국을 욕했다는 것을 아예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한국사회 비판서적 출간’, ‘한국비하 대체 왜?’, ‘두 얼굴 베라’ 등의 제목들이 그렇다. 아니 책의 내용이 아직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한국비하서적인지 안단 말인가?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덮어놓고 대중의 분노를 부채질하려는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자극적인 문구들을 제목에 배치했다. ‘한국 사랑할 필요없다’ , ‘쥐’ 등 기사 제목들을 훑어보니 누가 더 자극적인 문구를 뽑아내나 편집자 전국체전이라도 열린 것 같다. 극히 예민한 이슈이므로 자극성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할 판에 거꾸로 간 것이다.


‘미즈노’라는 이름을 친절히 제시한 제목들도 많다. 외국인 미녀에서 혐오스러운 일본 우익으로 이어지는 선정성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아무도 책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대뜸 욕부터 하는 네티즌도 문제이지만, 그런 네티즌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언론들의 행태는 더 심각하다. 언론이 이 정도 수준인 나라! 이건 대한민국의 수치다. 베라 사태로 한국 언론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지긋지긋한 고질병 -


국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우리 언론의 행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얼마 전엔 일본인의 이병헌 폄하 기사가 있었다. 한국인이 헐리우드 영화에 일본인 역할로 나오는 것을 서운해하는 일본기자의 글에 달린 자극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댓글들을 짜깁기해서 우리 언론이 기사화한 것이다. 당연히 우리 네티즌의 분노에 찬 인종차별적 댓글폭탄이 터졌다.


그전에 한국언론은 있지도 않은 일본에서의 이승엽 올림픽 보복 논란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했었다. 올림픽에서 한국에 진 데 대한 보복으로 일본팀이 이승엽에게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황당한 제목들을 기사화하고, 그것에 대한 이승엽의 멘트를 따내려고 했던 것이다.


대체로 언론은 ‘증오’로 폭발하는 네티즌의 군중정서를 비판해왔다. 그런 네티즌들을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증오를 부채질할 만한 일이 터지면 이번처럼 앞뒤 안 가리고 기사화 경쟁을 벌이거나,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감정적인 분위기로 몰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죽일 놈의 ‘증오장사’. 지긋지긋한 고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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