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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막장 임채무, 찌질 강석우, 초식 천호진의 동거

 

 요즘 드라마 속에서 ‘아버지’들이 과거의 권위와 힘을 잃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초식남 아버지들로 변해간다고나 할까.


한국인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왔다. 가부장제 시스템의 중심인물은 당연히 아버지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정에서 법과 금지의 화신이요, 군림하는 지배자였다. ‘호통’, ‘버럭’, ‘구타’ 등으로 상징되는 엄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들은 자애로웠으며 보다 친숙했다. 아버지가 자식을 엄히 가르칠 때, 어머니는 옆에서 그것을 말리는 존재였다.


그렇게 만만해진 어머니들은 자식을 협박(?)할 때, ‘너 이따 아버지한테 혼난다’라며 아버지를 팔아야 했다. 그랬던 전통적인 아버지상과 어머니상이 요즘 바뀌고 있는 것이다.


 주말 드라마 <그대 웃어요>에는 최불암이 전통적인 가부장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할아버지인 그의 말은 절대적인 ‘법’이다. 그가 모셨던 가부장인 ‘회장님’이 죽자 그는 회장님의 아들인 강석우까지 품는다. 처음에 거부하던 강석우는 차츰 최불암을 가부장으로 받아들인다. 최불암은 가족을 군대식으로 일사불란하게 통솔한다. 아무도 그의 리더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런 최불암은 드라마 중반부에 이르러 간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전통적인 가부장들의 현 위치를 보는 듯하다.


- 깽판 치는 아버지가 사라져간다 -


 최불암의 아들 세대가 천호진과 강석우이다. 이들이 요즘의 아버지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가부장인 최불암과 이들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들은 최불암에 비해 훨씬 온화하다. 호통으로 주위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 최불암과 달리, 이들은 부인이 친 큰소리에 쩔쩔 매기도 한다. 자식들의 깊은 상처를 잘 이해해주는 것도 이들 아버지들이다. 강석우는 ‘찌질’하기까지 하다. 전통적으로 아버지는 자식들의 롤 모델이었는데 강석우 캐릭터는 그것마저 거부하는 것이다.


 찌질하거나 온화한 아버지상은 <보석비빔밥>에도 등장한다. <보석비빔밤>의 한진희는 수다스럽고, 외모 꾸미기에 집착하며, 음식에 까탈스럽고, 행동이 찌질한 아버지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 역시 어머니보다 더욱 자식의 바람을 잘 이해해주는 아버지이다. <보석비빔밥>의 박근형은 온화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상이다. 박근형은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중간 나이대로 전통적인 엄함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식을 감싸주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엄함과 자애로움을 함께 보여주는 ‘회장님’ 아버지들은 <행복합니다>의 길용우, <아가씨를 부탁해>의 이정길도 거론할 수 있겠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수상한 삼형제>에 등장하는 아버지상도 온화하다. 박인환은 처음엔 엄한 전통적 가부장인 것처럼 등장했었지만, 이내 현대적 아버지상으로 변모하여 어머니의 패악질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식들을 달래주고 있다. 노주현의 경우엔 아예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혼자서 다 해내는 하이브리드형 아버지 캐릭터이다. 이렇게 온화한 아버지상에 비해 어머니들인 이효춘과 이보희의 성격은 대단히 극단적이고 공격적이다. 요즘엔 이런 식으로 어머니 캐릭터의 강화가 눈에 띈다.


 이런 변화가 시작된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1990년대부터 서서히 변화가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전통 사회에서 억압받았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0년에 방영된 <아줌마>는 그런 흐름의 한 정점이었다. 원미경이 찌질한 남편과 가부장적인 시댁에서 벗어나 ‘인간선언’을 하는 내용으로 당시 많은 화제를 모았었다.


 여성들의 지위가 올라가며 시작된 변화는 남성들의 지위가 하락하며 더욱 가속화됐다. 외환위기 이후 ‘사오정 오륙도, 기러기 아빠’의 폭풍 속에 남성들의 어깨가 축 처진 것이다. 이제 남성들은 과거처럼 군림하며 호통 칠 수 없게 됐다. 황혼이혼을 걱정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깽판 치는 아버지’ 캐릭터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도 이런 변화를 상징한다. 과거엔 밥상 뒤엎으며 온 식구를 벌벌 떨게 하는 아버지 캐릭터가 종종 등장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순종하고 인내하며 자식들을 다독였다. 지금은 이런 아버지 캐릭터를 상상할 수 없다. 그리하여 온화한 아버지, 자애로운 아버지, 엄마 눈치 보는 아버지, 즉 ‘초식남 아버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초식남 아버지, 찌질남 아버지, 막장 아버지의 동거시대 -


 그런데 한편으론 여전히 막 나가는 아버지들도 존재한다. 최근 <살맛납니다>에서 막장의 중심인물은 바로 아버지인 임채무였다. 보통 막장드라마의 독기가 여성을 통해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막장 아버지’ 임채무의 캐릭터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독한 막장 아버지가 아주 특이한 것만은 아니다. 막장과 통속극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에덴의 동쪽>에서 가장 악독한 독기를 발산했던 인물은 아버지인 조민기였다. 2009년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막장드라마 <천사의 유혹>에서도 한진희가 악독한 아버지로 나와 이소연과 독기 배틀을 벌였었다. 이런 사례들을 두고 아버지의 복권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보다는 드라마의 막장화, 캐릭터의 극단화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며 일부 아버지 캐릭터를 통해서도 그런 흐름이 표출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젊은 여자와 어머니들을 극단적으로 독하게 만들다 아버지에게까지 캐릭터 막장화가 옮은 것이다.


 아버지 캐릭터가 전반적으로 약해지는 것은 종법질서 가부장제 시스템이 해체되는 사회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 캐릭터들이 막을 수 없는 시대적 대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막장드라마도 계속될 터이기 때문에 우린, 천호진처럼 온화한 ‘초식남 아버지’와 강석우 같은‘찌질남 아버지’ 그리고 임채무처럼 독한 ‘막장 아버지’ 캐릭터를 번갈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