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에서 아쉽게 하차한 천지호역의 성동일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읽어보니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천지호가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역이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인터뷰에서 확인하니 놀랍다. 출연분량이 안석환이 맡은 방화백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 회 평균 두 씬 정도 나왔고, 그나마 11~12회에선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다.


주연들에 비해 훨씬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 그동안 그를 ‘미친 존재감’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연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다른 조연보다도 분량이 적었었단 얘기다. 그런데도 작품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니 이야말로 명실상부한 미친 존재감 아닌가.


천지호가 하차했을 때 ‘성동일 시대가 가고 안길강 시대가 온다’라는 식의 기사가 떴다. <추노>가 그동안 성동일 시대였다는 얘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연이 교체되는 줄 알 만한 기사였다. 그만큼 성동일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극 중 비중 대비 존재감으로는 아마 사상 최고의 캐릭터로 기록될 듯하다. 성동일이 새로운 역사를 쓴 셈이다.



- 미친 존재감을 만든 미친 연기 -


천지호는 죽을 때 노잣돈 엽전을 스스로 자기 입안에 밀어 넣는다. 여태까지 <추노>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은 남들이 엽전을 넣어줬었다. 그런데 천지호는 그 의례를 자기 손으로 치른 것이다.


이것은 천지호라는 캐릭터의 악착같은 생명력, 챙길 것은 챙기고야 마는 소름 돋는 근성을 적절히 표현한 설정이었다. 이 설정으로 천지호의 죽음 에피소드가 참으로 절절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그 설정이 원래 대본에 있던 게 아니었단다. 성동일이 소품팀에 엽전 두 개를 부탁해 스스로 그 설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래는 성동일의 말.


 “언제 등에 칼 날아올지 모르고 사람 못 믿는 게 추노꾼 천지호 아닌가. 이 놈 노잣돈 누가 챙겨주겠나. 대본에 없었지만 소품 팀에 엽전 두 개를 부탁했다. 천지호는 자기 노잣돈을 팔찌처럼 차고 다닐 인간이라 생각했다.”


이것으로 성동일이 얼마나 캐릭터 분석에 철저하고, 완벽하게 몰입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철저하고 완벽하게 캐릭터가 됐기 때문에, 그 얼마 안 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극을 장악한 미친 존재감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없던 대사도 성동일이 추가했다고 한다. 그 대사는 아래의 것이다.


“대길아 그래도 니놈이 이 언니 마지막 가는 길에 옷 한 벌은 해주는구나. 이히히히”


 이 대사도 천지호의 죽음 에피소드를 절묘하게 장식한 표현이었다.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살았던 천지호라는 캐릭터.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벼웠기에 아무리 절망적인 순간에도 웃을 수 있었던 캐릭터가 천지호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대길에게 농을 하며 보인 여유는 그런 천지호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천지호의 죽음을 신파로 늘어지게 하지 않고, 참으로 천지호답게 죽는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추노>는 너무나 절망적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밟혀도 죽지 않는 들판의 잡초처럼 질기게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천지호가 죽는 순간에 던진 농담은 그런 <추노>의 분위기를 적절히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천지호다운 죽음에 참으로 <추노>다운 대사였던 것이다.


서로 대립하던 천지호와 대길이 마지막에 그렇게 정을 나누면서, 결국 좌의정 등 기득권 세력의 가렴주구 앞에 동류일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동질성이 표현된 것이기도 했다. 죽네 사네 ‘나와바리’ 싸움을 벌이지만, 그들을 파리처럼 여기는 양반네들 앞에서는 결국 내 형제요 한 가족인 것이다.


천지호의 마지막 대사는 이런 정서까지도 완벽하게 표현한 절창이었다. 그것을 성동일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 <추노> 속 천지호로 살았던 성동일 -


성동일은 정말로 <추노>라는 세계 속에서 천지호로 살았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작품에도 어울리고 캐릭터에도 어울리는 설정이나 대사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을 것이다.


출연 분량이 극히 적은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완전하게 몰입하는 것에서 성동일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열정적인 배우인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짧은 등장 시간에 완전한 연기라는 선물을 시청자에게 주었다. 그리고 시청자는 주연급 이상의 예우로 그 연기에 화답했다.


어느 작품에 나오든지 자신의 기존 모습만을 보여주는 꽃미남 꽃미녀 배우들이 허다하다. 특히 요즘처럼 인기가수가 손쉽게 주연급 배우가 되는 풍토에선 더욱 그런 모습을 많이 본다. CF스타의 연기도 그럴 때가 많다.


이럴 때 성동일이 배우는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주연배우는 절대로 복수도 못해보고 중도에 허망하게 죽지 않는다. 천지호를 그렇게 어이없이 죽인 것에서도 <추노>에서 그가 얼마나 미미한 캐릭터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캐릭터로 최선의 연기를 보여준 진정 ‘언니’같은 배우, 성동일에게 경의를 표한다.


Posted by 하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