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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신언니’가 문근영을 바보 만든 장면

 

잘 짜인 구성을 보여주던 <신데렐라 언니>에 옥이 티가 나왔다. 6회에서였다. 그전에 은조는 새 아빠에게 가장 상처가 될 말을 했다. 그동안 빚 갚는 심정으로 이 집에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나가겠다고 했다.


기브 앤 테이크하는 냉랭한 관계가 아니라 친딸처럼 은조를 대해왔다고 자부하던 새 아빠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잔인한 말이었다. 6회에서 새 아빠는 정 그렇다면 집을 나가라고 했다. 은조는 알았다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때 엄마가 나타났다.


즉시 상황을 파악한 엄마는 박명수도 울고 갈 상황극을 펼쳤다. ‘나랑 은조랑 쫓아내는 거예요?’ 그러더니 ‘오버’하며 주저앉았다. 엄마가 주저앉자 은조는 걱정스럽고 당황스런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가 정신을 놓아버리자 다급하게 엄마를 부르며 엄마 얼굴과 새 아빠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마치 ‘우리 엄마 큰일났어요!’라고 새 아빠에게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설정이었다. 이 드라마를 대여섯 편만 봐도 이것이 이미숙의 여우짓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극중에서 엄마와 평생을 산 은조가 그걸 모를까? 은조는 엄마를 깊이 사랑하지만 동시에 깊이 불신한다. 엄마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믿지 못하고, 나아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은조는 자기 엄마가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사람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은조가 어떻게 엄마의 뻔한 여우짓에 기다렸다는 듯이 넘어간단 말인가? 이미숙의 여우짓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새 아빠로 족하다.


물론 이미숙이 워낙 리얼하게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은조도 놀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단순했다. 방금 전까지 남의 심장을 후벼 팔 정도로 냉소적이었던 은조가 갑자기 엄마 팔을 붙잡고 걱정하는 건 이상했다.


연기 초보자들이나 하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었다. 초보자들은 ‘슬픔’, ‘기쁨’, ‘놀람’, ‘두려움’ 등의 정서들을 단순하게 표현한다. 반면에 연기 장인들은 그런 1차원적인 정서들을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숙성시킨다.


지금까지 문근영은 냉소적이고 위악적이지만 속으로는 타인과 엄마를 배려하는 다층적인 모습을 잘 표현해왔다. 예컨대 겉으로는 ‘죽어버려라’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상대를 걱정해주는 식이다. 그래서 연기의 달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6회에서 갑자기 연기 초보자같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보여준 것이다. 문근영의 표정은 스테레오 타입의 ‘놀람+걱정함’으로 일일 홈드라마에서 착한 딸이 쓰러진 엄마를 부축할 때에나 나올 표정이었다.


비교하자면 <아이리스>에서 옥의 티 연기로 화제가 됐던 이병헌의 ‘으앗 안돼!’보다 더 튀는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신데렐라 언니>는 그동안, 은조가 말은 독하게 하지만 사실은 엄마를 사랑하는 여린 아이라는 걸 절묘하게 표현해왔다. 그런데 6회에서의 이 장면은 은조의 속마음이 너무 단순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작품의 운치가 반감됐다.



글자 그대로 ‘옥의 티’다. <신데렐라 언니>답지 않은 장면이었다. 문근영의 탓은 아니다. 작품 자체의 설정이었다. 엄마가 쓰러진 후에 다른 씬으로 넘어갔을 때도 엄마 머리맡에 앉아 엄마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이 은조가 엄마의 여우짓에 어이없게 넘어가는 것과 그녀가 엄마를 염려하는 여린 아이라는 것을 작정하고 보여준 것이다.


은조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는 에피소드였다. 은조는 마음의 창을 닫고 사는 아이다. 유일하게 기훈을 향해서만 열렸었는데, 이 에피소드 직전에 그마저도 닫힌 참이었다. 새 아빠의 속도 후벼 팠다. 그런데 엄마의 상황극에 화들짝 놀라 본색을 드러내다니. 은조의 상처는 그렇게 얕은 것이 아니다.


최소한 엄마가 정신을 잃기 전에, 눈물 흘리며 상황극을 막 시작했을 때 은조는 냉소와 불신을 담은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엄마가 눈물을 흘리자마자 은조는 ‘걱정 모드’로 돌입했다. 그래서 은조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작품이 연기의 장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문근영을 순간적으로 바보 만들었다고나 할까?


<신데렐라 언니>가 워낙 탄탄하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옥의 티가 작품을 무너뜨릴 순 없다. 그저 잠시 ‘어 이건 이상한데’라고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개연성이 없는, 혹은 단순한 설정이 반복되면 작품의 매력이 떨어질 것이다. 팬으로서 더욱 치밀한 <신데렐라 언니>를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