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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낸시랭의 민망한 혈액형 코드론

 

황당한 기사 제목을 보고 클릭했다. 제목은 이런 것이었다.


낸시랭 “절친 이효리-안혜경, A형에 솔직담백 코드 잘 맞아” 고백


낸시랭이 이효리, 안혜경 등과 혈액형이 같고 성격도 비슷해 코드가 잘 맞는다는 의미 같았다. 어느 기자가 작문한 것이라면 그저 그런 가십이겠거니 하면서 지나쳤겠지만, 앞에 낸시랭이라는 말이 붙으면서 이것이 그녀의 발언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황당했다.


클릭해보니 낸시랭의 발언이 맞았다. 그녀는 이효리, 안혜경과 코드가 잘 맞느냐는 질문에 제일 먼저 혈액형을 거론했다. 기사의 관련 내용은 이렇다.


앵커 : "이효리, 안혜경과 친하다고 했는데 소위 코드가 잘 맞냐?"

낸시랭 : "나를 포함 이효리, 안혜경 모두 혈액형이 에이(A)형이다" ... "음주가무를 즐기기보다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낸시랭은 현대예술가다. 그래서 특별한 지위를 누린다. 각종 매체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예능프로그램에도 예능적 능력과 상관없이 나간다. 한번 나갈 때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불안해하며 웃기려 애쓰는 여타 연예인들과는 전혀 다른 특별대우다. 똑같이 옷을 벗고도 누구는 무시당하는데 낸시랭은 예술이라며 주목 받는다. 그래서 솔비가 낸시랭에게 ‘당신은 뭐냐’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기사는 낸시랭이 YTN 뉴스에 출연해 대담을 나눴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것도 낸시랭의 특별한 지위를 보여준다. 솔비가 뉴스 스튜디오에 출연해 앵커와 대담을 나누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낸시랭이 ‘예술가’라서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그녀는 ‘하이클래스’인 것이다.


그런 지위를 누린다면 그에 걸 맞는 내실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혈액형이라니! 이건 평범한 연예인들의 잡담 수준 아닌가. 현대예술가의 발언이라기엔 너무 황당했다.



사람의 특징과 혈액형을 연결시키는 건 인종주의의 소지가 있다. 혈액형은 태어날 때 저절로 정해지는 것이어서,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누군가의 개성을 규정할 수 없다. 혈액형이 사람의 낙인이 되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혈액형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혈액형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은 독일의 인종주의에 의해 이용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인종주의와 결합했다. 일본은 혈액형을 근거로 자신들을 한국 등에 비해 우월한 인종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근대 초에 있었던 이런 혈액형 인간론이 1970년대 초에 일본에서 부활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유행을 좇고 명품을 사랑하며 왕자님을 기다리는 평범한 소녀들의 취향에 혈액형 인간론은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 그것이 한국으로까지 넘어와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혈액형 인간론의 정치적 의미와 그것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연예인들이나 평범한 대중이 잡담으로 나눌 수는 있어도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현대예술가가 할 말은 아니었다. ‘유행을 좇고 명품을 사랑하며 왕자님을 기다리는 평범한 소녀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연예인은 그래도 된다. 연예인들은 평범 또는 평균 이하를 표방할 때가 많고, 어려운 이슈에는 거리를 둔다. 그러면서 대중의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스스로도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추구한다. 그래서 존경 받진 않지만 사랑을 받는다.



현대예술을 하는 예술가들은 평범이 아닌 비범이라는 가치로 인정받을 때가 많다. 과거엔 감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적 비범성이 중요했지만, 기술적 능력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현대예술에선 그 비범성이 지적 능력에서 비롯된다.


똑같은 퍼포먼스를 하더라도 얼마나 뜻 깊은 ‘개념’이 그 안에 있는가, 그 개념이 얼마나 독창적이며 진정성이 있고 비판적인가 하는 것들이 중요해지고, 그런 개념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결국 지적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적 능력이라 함은 똑똑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세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런 통찰력을 번득이는 감각과 비판정신으로 표현해내기 때문에 현대예술가들이 특별한 존경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연예인에 비해 예술가들이 더 존중 받는다. 낸시랭도 바로 그런 위치인데,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혈액형’은 너무 민망했다.


이번 일뿐만이 아니다. 낸시랭은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며 ‘신자유주의’ 운운하는 작가다. 그런데 한 자리에서 ‘백수, 루저’라는 말을 경멸적으로 쓴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신자유주의는 멀쩡한 사람을 백수로 만드는 체제이기 때문에, 그 체제를 이해한다면 백수를 경멸할 수가 없다.


대신에 낸시랭은 평범한 젊은 여성들처럼 명품과 엘리트에 대한 선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섹시라는 대중의 보편적인 욕망에 부합하는 가치를 내세운다. 여기에 ‘백수’와 ‘혈액형’까지 종합하면, 낸시랭이 현대예술가로서 존중 받는 것이 코미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