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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서울메트로의 영화촬영금지 지나치다

 

서울메트로의 영화촬영금지 지나치다


10월 유신 후 각 방송사엔 드라마 제작 지침이 하달됐다. 그에 따라 드라마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그릴 수 없게 됐다. 그림자가 드러나면 국가가 손상당하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우리 사회를 너무 어둡게 그렸다는 등의 이유로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다. 우리나라는 언제나 밝고 활기찬 모습이어야 했다. 80년대에도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어~’ 이렇게 즐거워야 했다.


같은 시기 도시미화를 위해 살던 집에서 쫓겨나 외곽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구질구질한 삶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망칠 수 있으니까.


서울메트로가 시내 지하철에서 장편 상업영화의 촬영금지를 결정했다. 최근 <내사랑> 제작사 측이 당초 협의와는 달리 영화 결말에 지하철 화재 장면을 삽입시켰다며 이같은 제재 조치를 결정하고 서울영상위원회에 통보했다고 한다.(머니투데이 2008-02-19)


이에 따라 영화계 일각에서는 ‘서울영상위원회가 <내사랑> 스태프들과 작업을 하지 말라는 공문을 각 제작사에 보냈다는 소문도 나돌 만큼 흉흉한 분위기도 번지고 있다’고 한다.(스타뉴스 2008-02-19) 서울영상위원회는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분위기가 그만큼 냉각되고 있다는 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지하철에 불이 나는 사태는 나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하철에 불이 나는 모습을 영화 속에서 그릴 수 없도록 금지하는 것도 나쁘다. 둘 다 재난이다. 불이 나는 것은 사회적 재난이고, 불이 나는 모습을 금지하는 것은 문화적 재난이다.


미국 영화 속에서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고가 터진다. 지하철이 탈선하고 폭발하는 것쯤은 약과다. 고속도로가 붕괴하고 군대가 자국민을 공격한다. 그런 영화를 보고 무서워 미국인들이 집 안에만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문제는 한국 공공기관의 제 발 저린 ‘새가슴’이다. 그리고 문화적 표현에 대한 과민증이다. 영화 속에서 굳이 ‘하늘에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에 유람선이 떠있는’ 모습만 보여주지 않아도 한국 이미지에 아무런 손상 없다.


사실 해외에서 호평 받은 영화들은 대체로 우리 사회나 역사의 어두운 면을 그린 것들이다. <씨받이>를 보면 한국사는 야만의 역사다. <밀양>이나 <괴물>은 또 어떤가. <초록물고기>에는 최악의 인간군상들이 그려진다. 김기덕, 홍상수 감독의 추레한 한국사회 풍경은 또 어떻고.


그런 영화들로 인해 한국의 이미지가 널리 알려진다고 좋아했지 언제 부끄러워 한 적 있었던가? 중국 영화가 널리 알려진 것도 중국사회와 역사의 어두운 면을 진실히 드러낸 다음부터의 일이다. 중국 영화의 득세로 중국의 국위가 손상됐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공공기관은 왜 아직도 ‘새가슴’일까? 지하철은 공공기관이라고 봐야 한다. 지하철은 도시 기반시설이고 시민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드라마고 영화고 지하철을 피해갈 수 없다.


지하철을 관리하는 측에서 지하철 이미지를 통제한다는 건 예술적 표현을 통제하는 것과 같다. 지하철이 협조를 안 해주면 독자적으로는 찍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문화산업 종사자들이 지하철을 무조건 이용할 수밖에 없는 한 서울메트로의 과도한 관리방침은 곧 표현 통제일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사태를 아주 미시적으로 영화 <내사랑>에 한정해 보면 서울메트로의 반응이 일견 타당할 수도 있다. <내사랑>측이 애초의 협의를 어긴 것이 사태의 발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측컨대 그간 영화촬영협조를 하면서 쌓인 불만이 폭발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제작팀은 처음 협조요청할 때는 천사의 얼굴을 한다. 그러나 일단 조명과 카메라를 설치하는 순간부터는 악마가 된다. 시간을 어긴다든가, 현장을 난장판으로 만든다든가, 나중엔 처음 약속과 다른 줄거리가 나온다든가, 다른 이미지가 나올 수도 있다.


그간 누적된 영화계 관행에 대한 불만과 <내사랑> 측의 약속 위반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이런 일이 생겼을 수 있다. 그러나 장편상업영화 촬영 전체를 금지한 것은 서울메트로 측의 과잉대응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애초에 이미지를 통제하려는 것이 잘못이었다. 불이 나는 모습을 넣건 말건 서울메트로가 왜 상관한단 말인가? 곧 공개될 지하철과 관련된 한 독립영화도 이런 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주인공 기관사가 자살하는 설정이어서 메트로측의 협조를 받는데 4개월 이상이 걸렸고 결국 감독이 주인공의 직업을 택시기사로 바꿨다고 한다.(스포츠칸 2008-02-19)


이미지 통제할 여력이 있으면 실제로는 불이 안 나도록 단속이나 잘 할 일이다. 지하철 기관사는 얼마 전에도 추락사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노동조건이 열악하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 속에서의 기관사 모습에 신경 쓸 시간에 진짜 기관사 처우개선에나 진력할 일이다.


<내사랑> 측의 약속위반은 서울메트로와 해당 제작진이 해결할 문제다. 상업영화촬영 금지는 과민반응이다. 짜증이 누적된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느껴진다. 서울메트로의 성숙한 대응을 기대한다.


더 중요한 건 이미지를 통제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거다. 지하철은 삶의 무대다. 삶에는 어두운 면도 있고 밝은 면도 있는 것이다. 고마운 지하철도 있고 위험한 지하철도 있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통제한단 말인가? 교통사고 장면을 찍지 말라고 도로관리자가 통제하는 게 말이 되나?


군사독재정권은 그런 걸 통제하려 했고, 그것 때문에 앞으로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유지되는 한 영원히 비웃음을 살 것이다. 서울메트로가 고민할 지점은 여기다. 서울메트로는 기업홍보만 하면 그만인 사기업과는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