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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피고인 살린 고구마의 힘

 

SBS 월화극 피고인28.3%(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다. 시청률 16.3%에서부터 시작해 7회 만에 20%를 넘었고, 한 번도 경쟁작에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 방영기간 내내 인터넷에선 찬사보다 비난이 훨씬 많았다. ‘고구마드라마라는 비난이다. 고구마는 마치 고구마를 먹고 물을 마시지 않았을 때처럼 답답하다는 누리꾼 용어다. 그런 비난이 쏟아지는 데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은 부인과 자식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현직 검사 주인공이, 하나하나 과거의 비밀을 밝히며 결국 진범을 잡는다는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어두운 내용이고, 초중반 배경이 주로 감옥이기 때문에 단조로울 거라는 우려로 기대치가 낮았다 

방영 후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주인공이 징벌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과정이 단조롭게 반복됐다.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 진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작품은 ‘11기억원칙으로 아주 조금씩 단서를 공개했다. 시청자가 주인공과 함께 진실에 접근해가는 미스터리극 설정인데 그 과정이 너무 답답했고, 치밀하지도 않았다. 사이코패스 악당이 쌍둥이 형을 죽이고 형의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는 개연성이 떨어졌다. 재벌 2세가 교통사고를 일으켰다고 갑자기 일반잡범들이 있는 교도소방에 들어간다는 설정도 실소를 머금게 했다. 팍팍한 고구마에 설상가상으로 엉성함까지 가세한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일단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할 정도로 주인공 지성의 연기가 시청자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부인을 그리워하는 애달픔, 딸을 구하려는 간절함, 악인을 징치하려는 분노 등의 감정이 뜨겁게 표현돼 그 에너지로 극의 답답함과 엉성함을 녹여버렸다. 지성이 곧 개연성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극의 엉성함을 연기의 감성적인 면으로 메운 것이다. 지성에게 지쏘드(지성+메소드)’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메소드란 극중 인물과 혼연일체가 되는 연기법으로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말론 브란도 등이 유명한 메소드 배우다. 한국에선 김명민 등이 최고의 메소드 연기자로 찬사를 받았었는데 지성도 그 반열에 오른 것이다 

최근 시국 상황도 시청자의 감정이입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요즘 <피고인> 방영과 함께 <재심>, <조작된 도시>와 같은 영화들도 상영됐는데 모두 누명 쓴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뜨는 것이다. 모두가 억울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았지만 무시만 당한다는 상대적 박탈감. 거대한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무력감. 국가권력이 밀실에서 그들만의 리그로 움직인다는 불신감. 이런 것들이 답답하고 억울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게 하고, 길고 긴 과정을 거쳐 마침내 누명을 벗는 순간의 통쾌함을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고구마인 점도 시청률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이 작품처럼 사건해결에만 집중하는 것을 장르물이라고 하는데, 정말 긴박하고 치밀한 장르물은 찬사는 받지만 시청률은 잘 해야 10%대 초반 정도다. <피고인>은 장르물 치고는 느리고, 이성적 전개보다 가족 코드 등 감성적 설정을 내세워서 주말드라마 호흡에 익숙한 일반 시청자를 잡을 수 있었다. 주인공이 검사임에도 툭하면 분노발작, 오열로 이성을 잃어 누리꾼을 답답하게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도리어 시청률을 높였다. , 고구마임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엉성한 고구마라서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누리꾼, 젊은 사람들의 여론과 시청률에는 거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