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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음악 칼럼

<패떴> 위기의 빨간 불이 켜지다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공개됐다. 이것은 상당한 화제를 낳았다. 바로 다음날 주요 포털 연예면을 장식하며 핫이슈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패밀리가 떴다>에 대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프로그램을 보면 작가들의 존재가 분명히 인지된다. 작가는 대본을 쓰는 사람인데, 작가가 있는 프로그램에 대본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리얼 버라이어티도 사실 미리 짜인 각본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들은 항상 있어왔다. 그러므로 대본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 이성적으로는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랐다.


 이것은 첫째, ‘설마’가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막연한 추측과 확인된 사실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연예계 사람들과 대화하면 스폰서의 존재가 기정사실로 전제된다. 일반 사람들도 스폰서를 모두 사실로 알고 있다. 드라마 <온에어>에서도 스폰서 에피소드가 나왔었다. 수많은 신문에도 의혹 보도들이 나왔다.


 그러나 현업의 당사자인 아이비가 3억 원 운운하며 스폰서의 존재를 확인하자 상당한 충격파를 몰고 왔다. 아무도 ‘뭐야?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냐?’라고 하지 않았다. 모두들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것에 놀랐다. 하필이면 이런 사실과 이미지가 겹쳐버린 아이비는 그 충격파에 비례하는 타격을 받았다.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사실로 확인된 것도 비슷한 충격파를 낳았고, <패밀리가 떴다>의 ‘리얼’ 이미지도 그에 비례하는 타격을 받았다.


둘째, 상상 이상으로 자세했기 때문이다.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만 공개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리얼 버라이어티의 대본도 공개됐다.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만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다른 프로그램보다 강한 충격을 줘서 그렇다.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은 자세했다. 마치 드라마 대본 같았다. 캐릭터별 대사와 지문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었다. 종신-재석-대성-효리-천희-수로 등이 티격태격하며 대화를 진행시키는 것이 모두 나와 있었던 것이다. 유재석이 대성과 콤비를 이루며 빅뱅 노래를 부르고, 대성이 추임새를 맞추는 것도 대본에 제시된 설정이었다. 방에서 알콩달콩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정감어린 분위기가 연출됐던 것도 알고 보니 설정이었다. 인물들의 캐릭터도 대본상에 지정되어 있었다. 대사와 행동지문, 캐릭터까지 세세하게 제시된 대본. 그 자세함이 충격이었다.


셋째,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리얼’의 생명은 ‘리얼’이다. ‘리얼’이 아니라면 ‘리얼 버라이어티’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시트콤과 ‘리얼’을 구분하는 것은 양자간에 차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상 이상으로 자세한 대본은 그 정체성의 구분을 흔들었다. 판타지 세계로 치면 제1세계와 제2세계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지축이 흔들린 것과 같다.


- 망하면서 ‘리얼’을 확인 받았던 <무한도전> -


 <무한도전>이 야심차게 기획했던 여름특집 ‘28년 후’는 대재난을 당했다. 한 마디로 망했다. 망해도 그렇게 처참하게 망할 순 없었다. 엄청난 물량투입과 대대적인 예고가 있었지만 출연진의 실수로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박명수 때문에 출연자들이 길을 잘못 들었고, 겁에 질린 유재석이 중요 소품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극이 끝나버렸다.

<무한도전> 측은 2회 편성까지 노렸으나 1회분 분량도 건지지 못한 참혹한 결말이었다. 이 특집은 언론의 맹비난을 받았다. PD는 ‘한번만 봐주세요’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무한도전> 특집은 그렇게 망했지만 반대로 얻은 것이 있었다. 바로 <무한도전>이 정말로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시청자의 믿음이었다.

 예측불허의 우연이 지배하는 실재상황이라는 믿음. 이것은 사람들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장치다. 지루하게 밀고 밀리다 1대0으로 끝난 축구경기가 있다고 치자. 여기에 만약 사전에 정해진 대본이 있다면 그것을 전후반 내내 지켜볼 사람이 지구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엄청나게 자극적인 에피소드를 배치한 영화도 판판이 흥행에서 깨져나가는 세상이다. 누가 그런 지루한 구경거리를 보고 앉아있겠나.

하지만 사람들은 0 대 0 무승부라도 축구경기를 본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그 경기가 ‘리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협회들이 가장 금기로 여기는 것이 ‘승부조작’이다. <무한도전>은 특집을 말아먹으면서 자신이 ‘무조작’ 프로그램이라고 공인 받았다. 

 <무한도전>의 이런 ‘사즉생’의 자세는 절대적인 팬덤을 형성케 했다. <스타킹> 측이 연말 수상소감에서 편애가 심한 프로그램과 경쟁하느라 힘들었다고 토로할 만큼 <무한도전>의 팬들은 열정적이다. 일개 시트콤이었다면 이런 팬심이 가능했을까? 아니다. 벌써 식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축구팬은 평생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비슷비슷한 경기를 본다. 질리지도 않는다. 매 경기 경기가 ‘리얼’이니까. <무한도전>도 그런 믿음을 줬다. 


- ‘리얼’ 판타지의 지축이 흔들리다 -


 <패밀리가 떴다>의 ‘자세한’ 대본은 리얼의 신뢰를 직격했다. 그래서 당연히 있을 대본이 밝혀진 것에 불과한 데도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리얼과 작위적인 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리얼이면 많은 것들이 용서가 된다. 엄청나게 기대하면서 두근두근 시청을 시작했던 최홍만의 경기가 경기 시작 1분 만에 한 방에 끝나도 또 다음 경기를 기다린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기대했던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도 여전히 다음 경기를 기다린다. 리얼이니까.
 
작위적인 ‘극’이었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다. 작가와 감독은 비난으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극은 그것으로 끝난다. 함량 미달인 극을 봐주는 관객은 없다. 리얼은 엉성해도 용서가 되지만 극이라면 정말 잘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리얼의 신뢰가 흔들리는 것은 <패밀리가 떴다>에겐 큰 위기다.


 짝짓기 프로그램이 한때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강호동은 MBC에서 짝짓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원톱’으로 부상했다. 그때 사람들이 그것에 열광했던 것은 출연자들의 감정이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회를 거듭하면서 사람들의 신뢰는 깨졌다. 그러자 인기가 급속히 사라졌다. 최근 방영된 유사품인 <꼬꼬관광 싱글벙글>은 저주받은 실패작이 됐다. <우리 결혼했어요>도 리얼의 환상이 깨지자 가슴떨림은 사라지고 평범한 시트콤만 남았다.


 <패밀리가 떴다>는 지금 워낙 인기절정이고, 또 캐릭터의 매력도 확고한 상태이기 때문에 당장 어떻게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리얼이라는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적신호다. 이것은 판타지 세계의 지반에 균열이 가고 있는 것과 같다. 당장 붕괴하진 않겠지만 위기는 시작된 것이다. <패밀리가 떴다>는 더 재미있고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