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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소녀시대 태연 억울한 핀잔들었다

 

나는 걱정이 됐다. 가수가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되나? <일밤 - 소녀시대의 공포영화제작소>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제작진은 태연을 속이기 위해 다른 멤버들에게 쇼를 할 것을 요구했다.


첫 번째 쇼가 소녀시대 멤버들이 계속해서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러 태연을 겁주는 것이었다. 제작진의 지휘에 따라 소녀시대 멤버들은 악을 써댔다. 제3자인 나도 그 소리를 들으며 걱정이 됐었는데, 태연은 그룹의 당사자로서 당연히 걱정이 됐던 것 같다. 비명소리를 듣던 태연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 앨범 녹음해야 되는데... 애들 목 쉬면 안 되는데“


가수로서 당연히 해야 할 걱정이다. 억울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그렇게 당연한 걱정을 하는 태연이 오히려 핀잔을 들은 것이다. 같은 멤버들까지도 ‘득음을 할 것 같다’는 둥, ‘이런 상황에서까지 녹음 걱정한다’는 둥, 태연의 당연한 우려를 희화하했다.


MC는 태연더러 ‘현실적인 사람’이라며 웃었다. 맥락속에서 이 표현은 태연이 현실적인 이해타산을 너무 따진다는 뜻으로 들렸다.


물론 대단한 사건은 아니고 잠깐 스쳐 지나간 장면에 불과하지만, 한국 대중음악계와 예능의 현재를 선명하게 보여준 에피소드였다. 가수가 음악인으로 살지 못하고, 다른 것의 도구로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 말이다.



- 핀잔 들은 태연, 욕먹은 서태지 -


몇 달 전에 서태지가 엄청난 비난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방송사 음악프로그램에 다른 가수들처럼 출연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제작한 영상을 틀어줄 것을 제안한 것 때문이다. 그때 서태지를 비난하던 방송사 측 인사의 인터뷰 내용엔 이런 것이 있었다.


자신의 노래를 홍보하기 위해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인데 PD의 고유 권한인 편집권까지 요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행태다.“


방송계 사람들이 가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극명히 드러난 발언이었다. 가수를 자기 노래 홍보하러 방송에 구걸하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까 서태지가 방송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가수로서의 자의식을 내세우자 건방지다고 타박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프로그램 컨셉에 몰입하지 않고 녹음 걱정, 목 걱정을 한 태연이 자연스럽게 핀잔을 듣게 된 것이다.


방송사와 예능이 ‘갑’, 가수는 영원한 ‘을’인 셈이다. 녹음을 앞둔 가수가 소리를 꽥꽥 질러가며 예능에서 웃음을 팔아야 하는 현실이다.



- 락커의 몰락 -


요즘 김태원이 뜨고 있다. 그런데 음악으로 뜬 것이 아니라 예능인으로 뜨고 있다. <소녀시대 공포영화제작소>가 방영된 주에 <놀러와>에는 김태원과 유현상이 나왔었다. 유현상은 시나위, 부활 등과 함께 한국 락의 중흥을 이끌었던 백두산의 리더였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트로트를 들고 나왔다. 난 그의 음악적 취향이 변한 줄 알았었다. 그런데 <놀러와>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돈 때문에 트로트를 불렀던 것이다. 그는 락을 향한 열정을 억누르지 못해 요즘 다시 락음악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명색이 한 장르에서 일국의 최고 위치에까지 올랐던 음악인들이다. 그런데도 자기 음악으론 자립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백두산 유현상의 경우엔 트로트였고, 시나위 김종서, 부활 김태원에겐 TV 출연이었다. 음악만으론 자립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시나위 세대인 서태지가 자기 색깔을 고집하자 방송사는 ‘건방지다’고 했다. 쇼프로면 쇼프로, 드라마면 드라마, 방송사가 원하는 구색에 맞춰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이 가수의 조건이 된 것이다.



- 아이돌의 시대 -


현재 한국 최고의 가수는 단연 아이돌이다. 그 아이돌의 정체성이 태연이 핀잔을 듣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녹음 걱정하는 태연을 타박하는 것은 ‘니들은 가수가 아니거든? 방송인이거든?’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 방송인들이 한국에선 최고의 가수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태연이 목 걱정을 하고, 녹음 걱정을 하는 것은 가수로서 프로정신을 잃지 않는다고 상찬할 일이었다. 그런데 제작진은 물론 같은 멤버조차 태연에게 핀잔을 줬다.


‘가수가 왜 노래를 신경 써? 가수에게 중요한 건 얼굴과 몸과 개그지, 목이야?’


프로그램은 이런 메시지를 던져줬다. 가수 지망생이 춤연습을 하고, 예능이 가수쇼인 시대를 태연이 깜빡했던 것이다. 이제 대중에게 남은 것은 휴대폰 컬러링으로 적합한 감각적인 노래와 예능형 방송인들뿐이다.


태연은 가수로서 당연히 할 말을 했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당연하지 않았다. 한국 대중문화계가 정상이라면 태연의 프로정신이 존중 받고, 녹음 직전의 가수에게 꽥꽥 소리치게 한 방송사가 욕먹겠지만, 우리 현실에선 태연이 핀잔을 들었을 뿐이다.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