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천선>이 한국 드라마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놀라운 장면을 선보였다. 바로 ‘시청자 고문씬’이다. 한국 드라마의 특징은 시청자에게 대단히 친절하다는 데에 있다. 시청자가 다른 일을 하며 힐끔힐끔 화면을 봐도 내용전개를 이해하기에 별다른 무리가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진다.

 

그나마도 전개가 계속 이어지면 행여나 시청자의 머리가 아플까봐, 몇 번씩 과거 장면을 반복해서 틀어줘 스토리를 간곡하게 설명해준다. 애초에 구도 자체도 특이하지 않은, 익숙한 구도를 설정해 시청자의 두통을 원천봉쇄한다. 불륜, 출생의 비밀, 복수, 이런 구도들로 드라마 첫 회만 봐도 대충 흐름을 짐작할 수 있도록 극진히 서비스하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의 이런 특징들로 인해 한 교수는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팬들이 학력 수준이 낮은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가 중국팬들의 항의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분석은 이미 과거에 동남아에서도 나온 적이 있었다. 한국 드라마가 미국 드라마에 비해 시청자에게 대단히 친절하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쉽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서, 다양한 시청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반면에 미국 드라마 팬들은 전문직 고학력자 위주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개과천선>은 이번 주에 한국 드라마의 관습을 완전히 배반하는 장면을 선보였다. 은행의 환율 파생상품 사기 판매 의혹 사건 재판에서 전문용어와 수치들을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폭거’를 자행한 것이다. 덕분에 시청자의 머리는 복잡해졌고 도저히 힐끔힐끔 보는 수준으로는 드라마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됐다. 작품이 시청자의 머리를 쥐어뜯은 것이다. 심지어 막판엔 영어까지 등장했다. 한국어 설명도 행여 어려울까 같은 장면을 몇 번씩이나 서비스해주는 나라에서 외국어로 된 금융공학 강의라니! 이쯤 되면 시청자 고문이다.

 

 

 

가히 역대 최고 디테일이다. 이 정도까지 기득권 시스템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나, 법조계에서 사건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세밀하게 그려준 드라마는 없었다. 이 정도면 올해 최고의 ‘괴작’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다.

 

보통 사회드라마에선 ‘부자는 나쁜 놈이다’, ‘정치인은 나쁜 놈이다’, ‘재벌은 무소불위다’, 이 정도 수준으로 싸잡아 이야기를 해나간다. <개과천선>은 그 선을 가볍게 지나쳐 시스템의 안쪽으로 종심돌파를 감행한다. 싸잡아 나쁘고 그냥 힘이 세니까 무엇이든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느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 기득권 시스템의 톱니바퀴 역할을 하는 지를 보여준다.

 

또, 막연한 예화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사건을 파고드는데, 그 사건이란 것이 흔히 나오는 뇌물수수 정도가 아닌 고도의 금융사기 의혹이다. 그것을 <개과천선>다운 디테일로 그려나가다보니 결국 이번 주에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복잡한 장면중 하나로 여겨지는 장면까지 탄생한 것이다. 이 정도면 바보상자로 불렸던 TV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아쉬운 건 조기종영으로 인한 흐트러짐이다. 지금까지 차근차근 밀고 나가는 디테일한 전개로 시청자를 몰입시켰던 작품이, 조기종영 발표가 난 이후로 너무 속도가 빨라졌다. 그래서 이번 주에 여러 재판과 사건이 순식간에 이어지는 장면들이 마치 하이라이트 편집본처럼 느껴졌을 정도다. 올해 최고작이 됐을 수도 있었을 작품이 조기종영으로 흠집이 나는 것은 아닐까? <개과천선>을 조기종영시킨 우리 현실의 개과천선이 시급하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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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소문 2014.06.23 09:26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그래도 전 다 이해했습니다만, 뒷 배경에서 궁금한 부분이 많이 생기긴 하네요.
    18부작 정도되면 사안별로 프롤로그나 뒷 배경 스토리도 추가가 가능할텐데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