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에서 세손은 노론의 경기일대 관직 매관매직 행태를 적발하기 위해 영조의 능행을 기회로 삼는다. 노론은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대립한다. 긴장감 속에 능행이 시작됐으나 영조가 현지에서 괴질에 걸려 쓰러진다. 능행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극적 대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영조는 사경을 헤매며 궁으로 돌아온다. 노론의 부정부패는 결국 영조가 괴질에 걸리기 위한 떡밥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어의도 포기한 영조의 병을 고치겠다며 화완옹주는 하이테크 신약이라는 신비의 영약을 구해온다. 세손은 식품의약품안정청의 인증도 받지 못한 건강보조식품의 오남용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울 수 있다며 영약 쓰기를 거절한다. 노론의 부정부패 척결 이상의 극적 대립이 이어지고 결국 영조에게 영약이 투입된다. 화완옹주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이 약을 써달라고 한다. 홍국영도 세손에게 약의 효능을 진언한다. 이 괴질극이 무려 4회에 걸쳐 이어졌다.


신기하게도 어의까지 ‘죽여줍쇼’하면서 포기한 병자 영조가 벌떡 일어난다. 영약 만세, 건강보조식품 만세다. 결국 이 영약을 먹고 벌떡 일어나기 위해 노론은 경기일대 관직을 매관매직했으며 영조는 괴질에 걸려 신음해야 했던 것이다. 이 영약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홍삼이다. 그리고 이산의 협찬사는 홍삼을 판매하는 정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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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쓰러지자 당황해하는 세손. 바로 아래 구원의 메시지가 있으니 찬양하라 정.관.장.-


그다음 아래와 같은 기사가 떴다.


홍삼 제품 매출 급증

“...영조의 기력을 회복시킨 홍삼제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프라임경제 2007-11-20]


이산의 영조괴질극은 내가 단지 예로 든 것일 뿐 실제로 이 드라마가 돈 받고 극을 꾸몄다는 게 아니다. 정관장 협찬과 홍삼 찬양이 공교롭게 느껴지기는 한다.


인삼의 단점은 열이 많은 체질한테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거다. 홍삼은 그런 부작용이 없다고 한다. 드라마 속에선 영조가 열병에 걸렸는데 홍삼을 쓴다. 병세가 더 악화되자 명현현상이라고 친절히 설명해준다. 홍삼은 그야말로 만병통치인 셈이다. 그러나 과거에 난 어떤 한의사가 홍삼이 열부작용에 100% 안심인 것만은 아니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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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철철 흘리며 홍삼을 믿어달라는 화완옹주-

 

- 광고 아닌 광고, 방심하면 세뇌당한다 -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만약 MP3 기기 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내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린다면?


‘모모모 제품 써봤더니 아주 좋더라’.


혹은 갑자기 디지털 기기의 대약진이라는 주제의 글을 쓰면서 MP3를 슬그머니 부각시킬 수도 있겠다. 맥도날드로부터 돈을 받은 다음, 어떤 행사 후기를 쓰면서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문장을 집어넣은 경우는 어떨까?


‘마침 점심때가 되어 가까운 맥도날드에 가 햄버거로 급히 점심을 때웠다.’


담배회사한테 돈을 받고 내 칼럼 중에 이런 문구를 넣는다면?


‘너무나 황당한 사태에 결국 끊으려 했던 담배를 피워 물고야 말았다. 한국사회는 니코틴이라도 없으면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다.’


윤리적으로 내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내가 만약 ‘이렇게라도 돈을 벌어야 내 생활이 안정돼 더 좋은 글이 나온다. 취재와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돼 읽어주시는 이들한테도 더 좋은 일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나한테 뭐라고 할까?


돌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광고할 때는 이것이 광고라는 게 명확히 고지되어야 한다. 사람이 정보를 접할 때 그것이 광고인 줄 알 때는 문을 슬쩍 닫는다. 그러나 광고인 줄 모르면 무방비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세뇌당한다. 이성적으로 그것이 광고라는 게 명확히 인지돼야 세뇌당하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인지되지 않는 어떤 종류의 광고는 금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영상을 상영하면서 사람이 알아챌 수 없게 초당 24프레임 중 딱 한 프레임씩만 특정 제품 사진을 넣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식으로 광고했을 때보다 그 제품 구매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 물건을 산 사람은 자기가 왜 그걸 샀는지 모른다. 이런 것이 세뇌다.


더 무서운 얘기도 있다. 사람은 섹스와 데스(죽음)에 무의식중에 끌린다고 한다. 제품 광고에 사람이 알아챌 수 없게 섹스나 죽음 관련 이미지를 삽입하면 주목도가 상승한다고 한다. 소비자는 자기가 왜 그 제품을 주목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건 금지되어 있다. 사람이 알아챌 수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의 의미단위만 광고에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인지할 수 있는 의미단위라 할지라도 미리 광고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인지할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한 효과가 발생한다.


내가 친구랑 같이 전자제품 가게에 가서 특정 회사로부터 돈 받은 사실을 숨기고 ‘야 요즘엔 어느 회사 텔레비전이 짱이래’라고 말한다면, 그 친구는 광고 수십 편을 무시하고 내 말을 들을 것이다. 이것은 신뢰를 배반한 행위다.


위에 언급한 햄버거나 담배의 예들은 신뢰배반을 넘어 세뇌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 읽는 사람이 내가 쓴 글의 주제에 집중하면서 부지불식간에 광고메시지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짓을 하다간 미구에 난 돌을 맞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짓’이 허용된 부문이 있다. 바로 영상분야와 언론이다. 드라마와 영화는 공식적으로 이런 ‘짓’을 해도 된다. 언론은 비공식적으로 이런 ‘짓’을 한다.


매트릭스2의 하이라이트 장면인 고속도로 추격씬에선 수십 대의 모 회사 자동차가 등장한다고 한다. 영화의 가면을 쓴 광고였던 셈이다. 매트릭스의 박진감 넘치는 영상미는 고스란히 그 회사 자동차의 이미지로 전이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때 소비자는 자기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이미지의 전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네오의 멋진 액션을 보고 있다고만 인지할 뿐이다.


언론은 홍보대행사가 써준 기획기사들을 받아 보도한다. 갑자기 원두커피열풍이라는 식의 기획기사가 뜨고 그 안에 몇몇 브랜드가 소개되면 그 중 한 브랜드의 홍보작전일 수 있다.(대놓고 자기 혼자만 선전하진 않는다) 혹은 진지한 심층기획인 것처럼 보도되는 것이 사실은 유관업체의 홍보일 수도 있다.


영상과 언론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을 전면금지하자는 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는 일들이다. 또 이런 광고가 금지되었을 때 타격을 받을 영세 제작사와 언론사의 존립을 내가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소비자 입장에서 알고는 봐야 한다는 것이다. 모르고 보면 무방비 상태로 당한다. 특정 제품이 별다른 이유 없이 부각되거나 클로즈업으로 잡힐 때는 일단 의심부터 해야 한다. 방심하면 코베임 당하는 세상이다. 알고 보자 드라마, 깐깐하게 보자 각종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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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에서 홍삼을 들어보는 장면-


Posted by 하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