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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왕가네 식구들은 어떻게 국민드라마 됐을까

 

 

KBS2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이 시청률 43%를 돌파하며 이른바 국민드라마에 등극했다. 문영남 작가는 이미 지난 연말에 이 작품으로 KBS 연기대상 작가상을 받은 바 있다. KBS에서의 통산 네 번째 수상이었다. 그녀는 <조강지처클럽>, <수상한 삼형제>, <소문난 칠공주> 등의 히트작으로 김수현 이래 가장 시청률이 잘 나오는 작가라고 불렸는데 이번에 또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이 작품은 왕봉과 이앙금 부부, 그리고 그 딸들인 왕수박, 왕호박, 왕광박, 왕해박 등이 함께 사는 대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전까지의 주말드라마들이 보통 시월드, 즉 시댁에 구박받는 며느리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이 작품은 이앙금 여사가 주도하는 처월드에서 구박받는 사위들을 그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극이 상당 부분 진행된 지금, 처월드를 다룬다는 차별성은 이미 빛이 바랬다.

 

지금까지 방영됐던 막장드라마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가 막장드라마 논란을 주도했다면, 지금은 <왕가네 식구들>이 막장계의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된 것이다. 처음에 처월드에서 시작했든 시월드에서 시작했든, 구태의연하면서도 황당한 전개가 작품의 미덕을 가리고 있다.

 

 

 

 

- 왕가네 식구들, 왜 막장인가? -

 

일단 이름부터가 황당하다. 수박, 호박, 광박, 해박, 대박에 이앙금, 고민중, 허세달, 허영달, 박살라, 최상남 등 도무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앙금 여사는 이름처럼 앙금이 가득찬 인물이며, 고민중은 우유부단하기 이를 데 없고, 허세달과 허영달은 허세와 허영에 찌들었으며, 박살라 여사는 정말 박살내고 싶을 정도로 얄밉고, 최상남은 이름대로 멋진 상남자다. 최상남이 잠깐 선본 여자의 이름은 백지화여서 그들의 관계가 곧 백지화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트콤에서도 안 나올 듯한 우스꽝스럽고, 1차원적인 작명법이다. 이런 설정이 성인들이 보는 주말 정극에 버젓이 방영되는 것이다. 문영남 작가는 과거 <조강지처클럽> 당시 한원수, 한심한, 이기적, 이화상, 복분자, 구석기, 모지란, 정나미, 구세주, 홍보해 등의 이름으로 악명을 떨쳤었다. <소문난칠공주>에선 나덕칠, 나설칠, 나미칠, 나종칠, 구수한, 연하남, 황태자, 반찬순, 배신자, 공수표 등이 등장했다. 이렇게 1차원적인 이름은 인물의 캐릭터를 시청자에게 즉각적으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 수준으로 선명하고 단순한 인물들이다. 시청자는 머리를 쓸 필요가 전혀 없다. 극을 깊게 감상할 필요도 없다.

 

우스꽝스러운 작명법은 막장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최근 <황금무지개>에선 김만원, 김천원, 김백원, 김십원, 김일원, 천억조, 천수표가 등장해 시청자의 실소를 자아내고 있다. 시트콤보다도 황당한 이름들이 드라마의 품위를 떨어뜨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명법을 고수하는 건 그것이 자극적이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성격도 극단적이고 황당하다. 왕씨 집안의 안주인 이앙금 여사는 도무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물욕이 강하고 사람을 차별한다. 돈 주는 딸과 사위는 턱없이 예뻐하고 그렇지 않은 자식은 마치 남처럼 대한다. 그 어머니에 의해 극단적인 처월드가 형성되는데, 첫째딸도 현실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허세에 찌들어있다. 사돈 집안의 박살라, 허세달, 허영달도 마찬가지다. 절로 주먹이 쥐어질 정도로 얄미운 인물들을 배치해 시청자의 공분을 자아내고, 그들의 악행으로 몰입을 이끌어내며, 결국 얄미운 인물의 패망이나 개과천선으로 시청자를 후련하게 하는 도식적인 구성이다. 실제로 악명이 자자했던 얄미운 인물들이 극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한 명씩 쓴 맛을 보고 있다. 허세달은 철저히 망신당했고, 허영달은 무시했던 백수와 결혼했으며, 첫째딸은 결국 완전히 망해버렸다. 최근엔 셋째딸의 시부모가 턱없이 얄미운 인물로 나오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는데 이들도 결국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얄미운 사람들 곁엔 꼭 말도 안 되게 착한 사람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시청자를 안타깝게 한다. 첫째 사위, 둘째딸, 셋째딸 등이 착한 사람들인데 지나치게 착해서 현실성이 없다. 극단적으로 얄미운 인물과 극단적으로 착한 인물을 대비시켜 자극성을 극대화하는 수법이다.

 

황당한 이야기전개도 시청자의 공분을 사고 있다. 셋째딸과 시아버지 사이에 말도 안 되는 악연을 계속 만들어 셋째딸의 시집살이를 정당화한다든지, 며느리 오디션이라는 게 등장해 여러 처녀들이 특정 집안 며느리가 되기 위해 서바이벌 오디션을 벌인다든지, 둘째딸이 납치 자작극을 벌인다든지 하는 황당한 전개가 잇따라 등장했다. 최근엔 첫째딸이 집문서를 가지고 나가 부모의 집을 넘긴다는 어처구니없는 설정이 등장했다. 과연 본인 동의 없이 집문서만 가지고 타인의 집을 넘길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개연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그저 자극적인 사건들만 나열되고 있다. ‘보다 자극적으로! 보다 자극적으로!’를 외치는 <개그콘서트-시청률의 제왕>의 박대표가 지휘하는 드라마처럼 느껴질 정도다.

 

 

 

- 세결여는 안 되고, 왕가네는 되는 이유 -

 

최근 시청률의 여신인 김수현 작가도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주말에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12% 정도의 시청률로, 국민드라마로 승승장구하는 <왕가네 식구들>에 비해 초라한 성적이다. 무엇이 이 두 작품의 명암을 가른 것일까?

 

<왕가네 식구들>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개연성, 품위 등을 모두 내팽개치고 오로지 자극만을 강화했다. 황당한 사건들이 쉴 틈 없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패악을 부리며, 누군가는 망신을 당한다.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성격과 사건들이 시청자에게 공감을 주기도 한다. 또 악인의 말로가 통쾌감, 후련함을 느끼게 한다.

 

반면에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초반에 이야기 전개가 지지부진했다. 세 번 결혼할 것이 뻔한 데도 두 번째 결혼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고, 불륜 사건 하나 터지는 데도 무려 10회 이상이 소요됐다. 극단적으로 패악을 부리는 인물도 없었다. 과도하게 화려한 설정 때문에 서민들에게 공감을 주지도 못한다. 물론 나름대로 시월드의 자극적인 설정을 배치했지만, 날마다 대소동이 일어나는 <왕가네 식구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수시로 악인이 망신당하는 <왕가네 식구들>에 비해 통쾌감도 주지 못했다.

 

결국 자극성의 강도를 한껏 높여 거의 속옷 바람으로 달리다시피 하는 <왕가네 식구들> 탓에 <세 번 결혼하는 여자> 같은 잔잔한 작품엔 시청자의 눈길이 가지 않는 셈이다. 이렇게 자극적인 작품이 다른 작품을 밀어내며 득세하는 현상이 반복되면, 한국드라마의 앞날이 불길하다. ‘박대표’식의 ‘묻지마 초자극’ 작법은 <개그콘서트>에서나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