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는 2인자의 대명사였던 박명수를 MC로 기용해 화제를 불렀었다. 여자 아나운서 네 명을 투입한 것은 더 큰 화제가 됐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다.


11월 26일 방송된 ‘미녀들의 수다’는 TNS미디어코리아의 조사 결과 14.5%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1위를 굳혔다. 반면에 MBC ‘지피지기’는 6.7%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미수다’와 두 배 이상의 차이다.


물론 방송이 시청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 인정해줄 만한 의미가 있다면 시청률이 낮은 것은 (적어도 시청자 입장에서는) 문제가 안 된다. 지피지기의 문제는 시청률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전력투구한 흔적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조차 신통치 않다는 거다.


전력투구당한 방송국의 자원은 바로 아나운서들이다. 아나운서들도 순수하게 ‘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도 즐기고 원했던 일 같다. 낮은 시청률이 말해주듯 방송사는 얻은 것이 없어 보인다. 아나운서들은 이 게임에서 ‘스타성’이라는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지금으로선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결국 방송사는 이익을 얻지 못했고 의미마저 잃은 사례가 되는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아나운서들은 예능프로그램의 효자 출연자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됐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상상플러스의 노현정 아나운서일 것이다. 가끔 있는 특집 예능 프로그램에도 아나운서들이 등장해 시청률을 올려놨었다. 대중은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한 아나운서들에게 호감을 느꼈고, 기존 예능 연예인들과 언론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방송사는 점점 더 아나운서라는 자원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여기게 된 것 같다. 그리하여 아나운서들을 대거 예능프로그램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아나운서는 너무나 흔한 존재가 됐다.


방송사는 중요한 진리를 놓친 건 아닐까? 비록 거위가 황금알을 지속적으로 낳긴 하지만 거위를 잡는다고 해서 황금이 쏟아지는 건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아나운서는 예능인들과 신분이 달랐다. 특히 여자 아나운서들이 그렇다. 예능인이 광대라면 여자 아나운서는 지배계층의 예비 마나님군이다. 이것이 과거 여자 아나운서가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했을 때 남자 연예인들이 보인 열렬한 환호를 설명해준다. 또 여자 아나운서가 조금 크게 웃기만 해도 언론이 열광적으로 기사화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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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받았던 아나운서 이미지 변신, 스포츠서울 보도사진-


아나운서가 예비 마나님 계층이 될 수 있었던 건 미모에 더해 지성과 전문성, 품위를 갖췄다는 신화 때문이었다. 신화는 물론 멀리 있어야 유지 된다. 그래서 아나운서에게 하나 더 있었던 덕목은 희소성이다. 티비에서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는 희소성.


한 마디로 말해 아나운서는 연예인이 아니었다. 연예인이 아닌데 연예프로에 나오니까 사건이 됐던 것이다. 연예인이 아니라는 게 아나운서의 상품성이었는데, 방송사가 그 상품성에 혹해 과소비하면서 아나운서의 상품성을 깎아내리는 형국이다.


미녀들의 수다엔 기존 연예인이 아닌 여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지피지기도 거기에 맞불을 놓기 위해 기존 연예인이 아닌 여자들을 대거 등장시킨 것 같다. 그러나 그 귀결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다.


정형돈-손정은 스캔들, 이승기-서현진 스캔들처럼 여자 아나운서들도 이제 연예인처럼 소비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여자 아나운서들이 유효한 예능자원일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선배들이 지켜온 아나운서 이미지 때문이다. 현재 연예인화하는 여자 아나운서들과 방송사는 과거 아나운서들이 쌓은 이미지를 빼먹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가치를 잠식하고 있다. 마치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처럼. 벌써 퇴락한 시청률이 상품성 하락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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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엠씨와 게스트 사이에 ‘진열’된 아나운서들. 난감한 구도다-


여자 아나운서들은 연예인으로서의 경쟁력을 과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지피지기에서 그들은 ‘꽃’처럼 진열된 존재일 뿐이다. 게다가 그 꽃으로서의 경쟁력도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아나운서의 미모가 돋보이는 것은 아나운서로서의 후광 때문이었는데 연예인이 되면 그 후광이 꺼진다.


지금처럼 가면 연예인 지망생들이 점점 더 아나운서 되기를 희망할 것이고, 방송사는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으로 점점 더 아나운서들을 예능에 소비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아나운서 직종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럼 그때 가서 방송사는 교양프로그램 진행자 직업군을 새로 양성해야 하는가? 나중에 지금의 아나운서 출신들이 식상해지고, 그러면 새로 양성한 직업군을 또 투입하고, 예능계와 언론은 또 열광하고, 그 직업군도 연예인이 되고, 계속 이렇게 반복해야 하나?


아나운서의 예능 진출을 전면 금지하자는 건 아니다. 문제는 너무 과하다는 거다. 지피지기에서 네 명을 나란히 진열시킨 것은 빨간 불이 켜졌음을 의미한다. 가끔 가다 한 번씩 나오는 황금알이 감질나 배를 가른 모양새다. 방송사가 자제하든가, 아니면 아예 교양 아나운서와 예능MC용 아나운서를 별도로 선발관리하든가 교통정리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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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