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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음악 칼럼

예능제국 패권주의의 광포한 포식성

 

옛날에도 가수가 다른 일들을 많이 하긴 했다. 전영록도 그랬고 유명한 가수들이 의례히 영화에 한 번씩 나오던 시절도 있었다. 90년대 초엔 엄정화나 김민종, 손지창의 ‘더 블루’ 같은 사례도 나타났다.


요즘엔 경우가 좀 다르다. 가수의 겸업, 전업은 대세가 됐다. 핑클은 전 멤버가 이직 내지는 겸업을 했다. 베이비복스도 그렇다. 컨츄리 꼬꼬는 이제 사람들이 개그맨으로 안다.


최근의 아이돌들은 아예 가수활동을 타 분야, 특히 예능프로로의 진출을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아이돌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윤종신, 김종서 등은 예능 버라이어티에서 늦깎이 개그맨 소리를 듣고 있다. 이승환, 이승철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 콧대 높던 이승환마저 작업실을 나와 예능에서 몸을 던져야 하는 세상. 처절하지 않은가?


개그맨들은 아예 대놓고 꿈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진출이라고 밝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개그 프로에서 아무리 스타였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보조MC라도 맡으면 그것이 ‘영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어차피 엔터테이너인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추세는 위험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중요한 건 ‘정도’다. 지금 정도가 지나치게 과해졌다.


버라이어티 예능제국의 패권주의가 여타 분야를 모두 식민화하고 있다. 멀쩡한 전문 대중예술 분과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하위 장르로 전락했다. 이제 다른 부문들은 예능제국으로의 진입을 위한 등용문 정도의 위상이 돼가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 아닌가? 바로 구 제국들이 프로리그를 운영하면서 구 식민지 국가들에서 선수를 차출하는 구조와 같다. 구 식민지 국가들은 차출된 선수를 보며 열광하고, 그 선수들은 구 식민지 국가 후배들의 역할모델이 된다. 이것으로 구 식민지 국가의 리그는 독자성을 상실하고 구 제국 국가 리그를 위한 인재풀로 고착된다.


예능제국이 여타 분야를 자신의 증식을 위한 인재풀로 만들고 있다. 각 부문의 스타들을 버라이어티 블랙홀이 포식하는 것이다.


서태지가 확립했던 아티스트 권력은 곧 무너졌고 이젠 아티스트 권력이 아닌 기획사 권력과 버라이어티 스타권력이 나타났다. 내가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처음 접한 건 뮤직비디오를 통해서였다. 2007년 뮤직비디오 케이블이 주최한 연말음악상에선 올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한, 그리고 가장 유력한 기획사에 소속된 그룹에게 대상이 주어졌다.


이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에서부터 시작돼 HOT, 동방신기를 거치며 우리가 도달한 가요몰락사의 현주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가요차트점령은 혁명이었지만 이젠 가요순위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아티스트들은 이제 방송사에는 물론 버라이어티에도 예속된 처지가 됐다. 서태지와 함께 음악을 했던 김종서의 요즘이 그것을 웅변한다.


기획사들은 원 소스 멀티 유즈 전략에 따라 가수들을 최대한 많이 ‘돌린다’. 이런 건 원래 시장의 룰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문제는 특정 부문의 지주가 되어야 할 사람들까지 예능에서 ‘돌려진다’는 거다.


세상에 어느 문화 선진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방송국에서 킬링타임용으로 내보내는 오락프로그램에 가수들이 종속된 이런 황당한 처지에서 우리 대중문화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까?


- 예능이 잘못한 게 아니다 -


지금 누구를 비난할 상황이 아니다. 대중예술계의 어느 특정인이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게 딱 한국이라는 나라의 현재 수준이다. 1990년대 이후 맹목적으로 시장 자율성을 확대해온 결과 우리나라는 소수 부자와 다수 가난뱅이의 나라가 되어가고, 대중예술을 소비할 대중이 가난해진 결과 대중예술이 가난해지고, 가난해진 대중예술인들이 버라이어티 예능프로그램에 목숨을 걸게 되자 예능제국의 기치가 섰다.


이건 MP3 무단복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출판, 문학, 순수학문, 대중음악, 영화 등 모든 부문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금 한국인들은 직업안전성 쟁취에 사활을 걸고 있다. 운동권은 비정규직 혁파운동에 일반인은 정규직 획득 투쟁에. 이런 상황에서 문화가 풍성해진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무단복제가 문제의 근원이라면 무료로 볼 수 있는 TV 가요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극단적으로 떨어진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사서 듣던 복제해서 듣던 들을 만한 것 자체가 안 나오는 것이다. 그럼 창작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풀릴 문제인가? 아니다. 이미 대중이 예능제국의 신민이 돼버렸는데 창작자들이 어느 시장을 보고 열심히 노력한단 말인가.


예능프로그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예능프로그램의 열렬한 시청자다. 예능프로그램의 목표는 최대한의 오락성이고 그것을 시청자에게 전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다.


예능프로그램을 통하지 않고서도 각자의 전문 분과에서 예술적 전문성만으로도 스타성과 고소득을 유지할 수 있는 시장의 풍성함이 필요한데, 현실은 거꾸로 점점 가난한 시장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나마 학생들의 용돈은 모두 IT 통신 계통으로 빨려 들어가서 버라이어티 예능프로그램으로 문화적 욕구를 해소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발을 딛고 있는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이 문제를 연예인 당사자들은 절대로 풀 수 없다. 그들은 시장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해 움직일 뿐이다. 누굴 비난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점점 가난해지고 척박해지는 사회. ‘부패해도 좋으니 범죄 의혹이 있어도 좋으니 그저 경제만 살려다오’라는 대중의 외침이 사위를 뒤덮고 있다. 문화성이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문화판 안에선 답을 찾을 수 없다. 암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