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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타인의 삶>과 한국의 자살성장 위업



영화 <타인의 삶>은 구동독 비밀경찰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비밀경찰, 슈타지의 요원이다. 주인공은 어느 날 연극을 보고 연극 작가의 풍모에서 ‘반역자’의 냄새를 맡는다. 마침, 함께 연극을 관람한 고위층도 그 극작가에게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하여 주인공에게 그 극작가를 감시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주인공은 도청을 통해 극작가의 삶을 관찰한다. 극작가는 반체제 인사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극작가를 반체제 인사로 모는 것은 동독체제의 경직성이다. 동독사회의 비인간성에 비해 극작가의 삶과 그가 속한 예술가 사회는 따뜻하기 그지없다.


비밀경찰 요원으로서 주인공의 삶은 건조하다. 주인공은 사무적으로 관계하는 창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온기를 느낄 정도로 인간적인 어떤 것을 그리워한다. 이웃 어린 아이에게조차 비밀경찰이라고 경원시당하는 주인공에게 극작가의 세계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


자신도 모르게 극작가와 가까워진 주인공은 점차 자신의 본분을 잊게 된다. 하지만 그는 비밀경찰 요원이다. 동독 사회는 극작가와 주인공을 그냥 두지 않는다. 위험이 조여 온다.


이 영화를 보고 운 사람도 있다던데, 난 운 정도는 아니고 막판에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사람을 대놓고 울리는 신파류의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울리는 영화보다 여운은 더 긴, 그런 스타일의 영화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이쪽이 확실히 여운이 더 길고 무겁다.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아직 안 본 분은 한번 보길 권한다. 영화얘기는 여기까지.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난 한국사회를 떠올렸다. 극 중에서 동독 사회의 폐쇄성에 분노한 극작가는 서독의 <슈피겔>지에 비밀리에 동독을 고발하는 글을 기고한다. 그 글은 자살률에 대한 것이다.


 “한스 바이믈러 가의 국가 통계청에선 모든 것을 통계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일년에 구입하는 신발의 수 : 2.3켤레

일년에 읽는 일인당 독서량 : 3.2권 ...

하지만 통계 낼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거기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통계는 관료들 자신에게 고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자살률이다. 만약 당신이 바이믈러 가의 사무실에 전화해서 질문한다면,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엘베강과 오더강 사이에서, 발트해와 오레산맥 사이에서 자살하는지에 대해서, 그럼 우리 통계청께선 침묵하실 거고, 아마도 당신의 이름을 정확히 기록해놓을 것이다. 슈타지를 위해서. 국가의 안보와 행복을 돌본다는 이곳의 잔인한 요원들을 위해.

 1977년 우리나라는 자살자 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스스로를 살해하는 자‘ 국가는 그들을 이렇게 칭한다 ... 우리가 9년 전에 자살통계를 그만 둘 때, 유럽에는 동독보다 자살자 수가 많은 나라가 단 하나 존재했는데, 헝가리이다.“


극작가는 이 글로 동독 사회를 고발했다. 동독 당국은 이 글을 자신들의 치부를 들춘 것으로 간주했다. 영화 속에서 동독 당국은 이 글의 작자를 색출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자살자가 많은 것이 단지 동독뿐인가?


지난 1982년 대한민국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6.8명으로 OECD 국가들 중에 하위권이었다. 이 영화에서 동독보다 더 자살률이 높은 나라로 지목되는 헝가리의 경우는 당시 39.8명이었다.


9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시작했다. 남들이 자살자를 줄여갈 때 우린 자살자를 늘여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2005년에 이르러선 OECD 자살률 1위에 등극했다. 전통적인 자살강국이라는 헝가리마저 제쳤다. 2005년에 우리나라는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24.7명, 헝가리는 22.6명이다. 우리가 자살성장률에서 초유의 압축성장을 기록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미국 국방부는 2006년 9월, 이라크 주둔 미군이 공포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보고서를 냈다. 2005년 이라크 주둔 미군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19.9명이었다. 우리나라는 아마도 국토 전체가 통째로 전쟁보다 더한 스트레스 상태에 빠져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미국의 임금소득격차마저 추월해 초유의 양극화 압축성장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민의 삶을 파탄으로 이끌었다. 직장에서의 안전성도 사라지고, 학력경쟁은 더욱 격심해졌다. 한국인의 삶은 너무나 괴로워졌다.


2008년 한국 정치권에게 주어진 책무는 바로 이런 양극화 압축성장, 자살 압축성장을 되돌리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경제위기를 겪으면 우리는 양극화, 자살 성장에 터보 엔진을 달게 된다. 사회는 궤멸국면에 진입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 정부는 양극화 해소엔 관심이 없고, 친부자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서 양극화를 오히려 심화시키고 있다. 왜 그럴까?


자살하고 고통 받을 사람들은 단지 ‘타인’일 뿐이기 때문일까? 약자는 가난해지고 강자만 부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약자를 방치하는 건, 약자를 ‘타인’으로 여겨서일까? 약자의 고통은 단지 ‘타인의 삶’일 뿐인가?

더 황당한 건 우리가 자살률-양극화 부문에서 초유의 압축성장을 달성한 시기에 정권을 담당했던 집단에게서 추호의 반성의 빛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민생파탄은 곧 내수파탄으로 오늘날 경제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당당하다. 그들에게도 약자는 ‘타인’일 뿐인가? 국민이 자살하고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경제는 좋다’라고 세월 좋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무슨 경제? 누구의 경제? ‘타인’을 제외한 ‘그들’만의 경제?

영화에서 그려지는 암울한 동독처럼 우리의 자살률도 치솟고 있다. 비밀경찰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자살한다는 건 그 사회체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동독과 비견될 정도라면 우린 지금 매우 이상한 길을 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많은 국민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하지만 친부자 정책과 함께 그저 법질서(경찰력)만 강화된다. 이미 노무현 정부 때부터 공청회에 경찰력이 투입되는 경찰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이명박 정부는 백골단까지 부활시키고 있다. 정말로 동독의 어두운 면과 비슷해지고 있다. 왜 내가 동독을 그린 영화를 보며 한국 사회를 떠올려야 하나?

다가올 경제위기에 약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을 것이다. 현금을 보유한 사람들은 자산폭락시기에 오히려 더 부자가 된다. 부자들에게 지난 양극화 시기는 축복이었다. 그러나 약자들에게 닥칠 미래는 ‘자살’이거나 ‘노예화’일 뿐이다. 암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