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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에덴의동쪽 손발이 오그라드는 절대핏줄주의

 

신태환은 입이 귀에 걸렸다. 똑똑한 이동욱 검사가 자기 아들 신명훈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전엔 이동욱 검사가 비리를 파헤칠수록 전전긍긍하더니 이젠 “역시 내 핏줄답군 그래”라며 의기양양해 한다.


<에덴의 동쪽>은 초반부터 ‘핏줄’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했었다. 주말 드라마도 아니고 주중 미니시리즈에 등장하는 ‘핏줄’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는데 이젠 그 핏줄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45회 마지막 부분에서 신태환은 선언한다. 이젠 ‘핏줄 대 핏줄’ 싸움이 됐다고.


이동욱 검사의 활약상이 티비에 나오는 것을 보며 신태환은 이동철에게까지 “내 자식 내 핏줄 자랑”을 한다. 팔불출이 따로 없다. 인간의 지성,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계, 경험 다 필요없다. 오직 핏줄이다. 그야말로 ‘핏줄절대주의’다.


지현(한지혜)이 왜 갑자기 얄미운 캐릭터가 되는지 처음엔 이유를 알지 못했었다. 지현은 처음엔 한없이 착하고 순수한 천사 캐릭터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신태환과 짝짜꿍이 맞는 냉혹한 경영자가 됐다. 경영비리나 정경유착을 저지르기 위해 타고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 변신이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전혀 개연성이 없었다. 이 드라마 전반부의 지현과 후반부의 지현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핏줄절대주의로 보면 이것도 설명이 된다. 지현은 아마도 신태환의 핏줄이다. 신태환의 딸이므로 그는 얄미워져야 했던 것이다. 초반부의 착한 성격은 낚시였다.


이동욱 검사의 변신도 황당하다. 착하고 여린 캐릭터였는데 핏줄이 밝혀지고 난 후 갑자기 독한 사람이 됐다. 그의 수사선상에 이동철이 나타나자 그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형이 최소한 내 걸림돌이 되진 말란 말이야!”


이것이 여태까지 이 드라마에서 그려졌던 ‘이동욱’의 대사가 맞나? 핏줄이 밝혀지자 갑자기 인물의 인성이 변한다. 마법같은 핏줄절대주의.


그동안 왠지 이동욱에게 정이 안 갔던 것도 이제 이해가 간다. 이기철의 아들인 이동철은 동생과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했다. 반면에 이동욱은 (비록 고난의 길이었지만) 자기가 좋은 길로만 갔다. 가족과 동생을 짊어지고 사는 이동철에 비해 이동욱은 그 캐릭터의 매력에서 차원이 달랐다.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그것도 결국 핏줄 때문이었다. 이동욱 검사가 타고난 핏줄은 이타심, 희생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래서 ‘착한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상에서 계속 정이 안 가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이동철과 신명훈(친동생)이 서로를 인정하고 만나는 곳은 강원도 탄광촌 아이들의 놀이터다. 이곳은 이기철-이동철-이동욱의 꿈이 이어지는 곳이다. 그곳에서 끊어졌던 핏줄은 다시 이어진다.



거기에 찾아온 지현은 이동철에게 말한다. “역시 핏줄이 무섭긴 무섭네요.” 이동욱 검사는 “피붙이하고 피붙이 아닌 사람들이 갈린다”며 “어차피 이렇게 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제일 황당한 건, 가장 이기적인 캐릭터로 변신한 지현의 이동철 어머니(이미숙)에 대한 증오다. 그는 이동철 형제가 신태환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는 이미숙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밑도 끝도 없다. 이것도 핏줄의 증오라는 이유로 정당화 된다.


핏줄 하나만 가지고 인물의 성격이 제멋대로 규정된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다 설명이 된다. 핏줄 판타지다. 이기철 핏줄은 따뜻하고 신태환 핏줄은 냉혹하다. 무조건 그렇다. 월화요일 밤마다 핏줄로 뒤엉킨 그들이 비수를 들고 대치하고 있다.


도무지 감정이입이 안 된다. 보는 사람은 관심도 없는데 등장인물들끼리 울고 짜는 핏줄 타령은 드라마를 산으로 보내고 있다. 이런 핏줄 타령에 미니시리즈 시청자 층이 감동할 리가 없다.


<꽃보다 남자> 제작자는 <에덴의 동쪽>의 시청률을 따라잡을 거란 예상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에덴의 동쪽>은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 지지부진한 핏줄의 덫에서 빠져나와 초중반부의 빠른 서사적 전개로 돌아가는 것이 <에덴의 동쪽>의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