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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성찰하는 장르영화 콜래트럴

성찰하는 장르영화 콜래트럴

- twilight zone(경계지대)? 엿이나 먹어!


영화는 어느 공항의 붐비는 공간에서 시작한다.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걷던 두 남자가 부딪히고 그들은 서로의 가방을 바꿔 들고 간다. 그 중 한 남자가 톰 크루즈. 당연히 주인공. 그런데 선한 영웅의 역이 아니다. 그는 비정한 청부살인업자다. 그가 받은 가방엔 그가 죽여야 할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서로 부딪힌 두 사람 간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공동체가 해체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 동일성에 소속되지 않은 분자적 개인이 잠시 접속했다 떨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접속은 몇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새로운 배열을 만들어낸다. 아주 건조하게, 지극히 사무적으로.


다른 또 한 명의 주인공은 택시기사다. 배우는 제이미 폭스.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글인 도시의 질서를 벗어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 그의 택시를 탄 손님들은 그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그의 존재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은밀한 섹스얘기까지 거침없이 한다. 같은 택시 안에 있지만 완전히 단절된 개인들. 자본주의 시장사회의 모습이다.


그가 대화를 나누는 첫 장면은 길을 찾는 문제로 여자손님과 실랑이를 하는 씬이다. 손님이 가자고 하는 길을 그가 거부한다. 그리고 더 빠른 길을 제시한다. 의아해진 손님이 묻는다. “손님과 싸움을 하면서까지 요금을 줄여주는 기사가 어디 있죠?” 그는 자본주의의 일반율을 어긴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인간을 합리적 행위자로 본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건 ‘자기 잇속만 차리는’이란 뜻이다. 자본주의는 익명의 존재들이 ‘합리적/이기적’으로 행위하고 접속하고 흩어지는 체제다. 그런데 그는 ‘합리적/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 순간 ‘익명성’이 깨진다. 택시기사와 여자손님 간에 화폐를 매개로 한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생명)적인 유대가 생긴다.


그 여자손님을 데려다 준 후 다른 손님이 택시를 탄다. 그가 톰 크루즈다. 톰 크루즈는 그에게 화폐를 제시하며 하룻밤 전속기사가 돼 달라고 요구한다. 화폐를 내밀면서 나타난 새로운 손님. 그는 이런 말들을 한다. “이 도시는 너무 넓고 단절돼 있어요... 사람들은 서로 알지 못하죠...시체가 지하철에 여섯 시간 동안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데요.”


톰 크루즈는 택시기사에게 끝없이 말을 한다. 마치 화폐로만 매개된 익명의 접속이 아닌 인간적 유대를 꿈꾸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왜 사람을 죽였냐는 택시기사의 물음에 그는 답한다. “뭐가 문젠데? 그 사람이 누군데? 나는 나의 일을 할뿐야... 내가 죽이지 않았어. 총알이 죽였지.” 그리고 다윈이즘과 역경(주역)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을 왜 던졌냐는 말에 사무적으로 대답한다. “내가 던지지 않았어. 그가 떨어졌지.”


택시기사가 “그가 무슨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죠?”라고 묻자 톰 크루즈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묻는다. “뭐?” 누가 누구한테 잘못을 하고, 거기에 복수를 하고 하는 인간적 관계는 톰 크루즈의 머릿속에 아예 없는 거다. 그는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사무를 볼 뿐이다. 회사의 경영관리표를 앞에 놓고 수치를 보다 높이기 위해 맡겨진 일을 하는 사람의 펜 끝에 수많은 가정이 파탄난다 해도 아무도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듯이.


총을 든 청부살인업자가 다윈이즘과 역경을 함께 말하는 건 의미심장하다. 다윈이즘은 시장주의의 근원이다. 개인이 각각의 원자로서 자유롭게 경쟁하고 패자가 도태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는 사고방식.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이다. 그런데 거기에 역경을 묶어 넣은 데서 시나리오 작가의 통찰이 빛난다.


역경의 세계관은 이 세상에 하나의 목적도 없고 불변의 진리도 없고 그냥 흘러감이 있을 뿐이라는 거다. 정지한 세계가 아니라 운동하는 세계고, 운동하기 때문에 모호한, 확정될 수 없는 세계다. 주체는 그 얽히고설킨 거대한 우주 안에서 그저 한 인자일 뿐이다.


킬러는 대단히 냉소적이다. 그는 사람을 왜 이유도 없이 죽였냐는 진지한 물음에 “왜, 그러면 안 돼?”하면서 냉소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세상, 도덕적 당위가 더 이상 신성하지 않은 그냥 흘러가는 세상, 신이 죽어버린 세상에 개인의 자유를 막는 건 없고, 개개의 행위에 필요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하여 역경과 다윈이즘, 킬러, 자본주의가 연결된다. 흔히 동양의 역경적 사유를 탈자본주의라고 오해하는데 이 영화의 작가는 톰 크루즈의 냉소를 통해 정확히 그 연결관계를 통찰했다.


서양에도 역경적 사유가 있다. 이른바 탈근대사상이라는 유행이다. 탈근대사상은 서양인들이 수천 년 간 애지중지해온 가치를 진리중심주의, 이성, 언어중심주의라며 냉소한다. 그리고 주체의 통일된 의도를 무시하고 오로지 구체적인 그때그때의 행위만을 말한다. 톰 크루즈가 “내가 죽이지 않았어. 총알이 죽였지.”라고 하는 건 주체중심주의를 해체하자는 서양 탈근대 담론의 킬러판을 보는 듯하다.


주역의 세계는 모호하다. 탈근대의 세계도 모호하다. 정지된 세계가 아니라 운동하는 세계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명명백백한 진리, 분명한 가치, 지켜야 할 당위를 숭상했다. 모호한 것은 서양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잠깐 모호한 것들이 나왔지만 곧이어 나타난 이성의 빛에 가렸다. 이 세상을 백과사전의 항목으로 정리하는데 모호한 것이 있을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서양에서 모호한 것, 운동하고 변하는 세계를 요청하는 것이 탈근대 담론이다. 화폐로 분명히 수량화 되고, 사회가 기계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 모호한 것을 요청하는 탈근대 담론은 흔히 탈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모호함과 냉소로 전통적인 가치를 해체하고 전복하고 탈주하는 개인들이 얼마나 자본주의적 존재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선악의 이분법을 냉소하는 탈근대. 택시기사가 “나쁜 놈”이라고 하자, “난 나쁘지 않다”라고 하지 않고, “헛소리”라며 받는 톰 크루즈.


항상 무표정한 표정으로 세상의 가치에 대해 냉소하던 톰 크루즈가 당황하는 건 택시기사의 도발 때문이다. 인간적인 가치를 제기하다 톰 크루즈의 타박만 받던 택시기사는 “그래 니 말대로 해주지”하며 가속페달을 미친 듯이 밟는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그래 아무 의미도 없어. 우린 아무 것도 아냐. twilight zone(경계지대)일 뿐이지. 이게 무슨 의미냐고? 엿이나 먹어!”


킬러-자본주의-다윈이즘-역경에 이어 twilight zone이 나왔다. twilight(황혼)은 모호함의 상징이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 이성의 빛 경계선에 있는 그 시간은 마법의 시간이고 주술의 시간이다. 서양 중세는 twilight을 마녀로 몰아붙였고 근대는 twilight을 광기로 배제했다.


탈근대는 이것을 동일성의 폭력이라고 하며 twilight을 다시 요청한다. 그리고 twilight을 배제했던 그 의미주의, 진리주의, 이성주의, 인간 중심주의에 냉소한다. 그래서 마치 대단히 진보적인 사상인 것처럼 오해되고 오늘 날 한국의 지식사회를 휩쓸고 있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말한다. “엿이나 먹어... 니 머리에 총을 들이대면 어쩔 건데? 그래도 의미가 없어?”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데 페달을 마음껏 밟은들 어떠랴. 그러자 느긋하게 냉소하던 톰 크루즈가 드디어 긴장한다. 그리고 차를 어서 세우라고 다급하게 말한다. 그가 ‘의미’를 찾은 것이다. 이 장면은 의미, 가치에 대해 냉소하며 해체, 탈주, 전복, 유목 등에 열광하는 현대적 경향성을 향한 통렬한 야유로 읽힌다.


이 영화는 장르영화다. 그러나 그 안의 톰 크루즈가 맡은 캐릭터는 장르의 평면성을 뛰어넘은 성취가 있다. 청부살인업자과 다윈이즘, 자본주의를 묶은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거기에 역경을 넣고 의미에 대한 냉소를 넣음으로서 현대의 병폐를 온전히 보여주는 비범한 캐릭터를 창조해낸 것이다.


택시기사는 익명성, 냉소를 거부하고 그래도 지켜야 할 가치와 유대를 꿈꾼다. 둘과 하나로 나뉘어지는 마지막 장면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기억될 만하다. 헐리웃은 가끔 이상한 장르 영화를 세상에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