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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명량, 배설과 후손이 무슨 상관?

 

경주 배씨 비상대책위원회가 결국 <명량> 제작진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그들은 ‘상술에 이용돼 하지도 않은 악행들로 명예에 먹칠을 당한 당사자들을 포함해 영원히 낙인이 찍힌 우리 후손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고 호소했다.

 

과거 <허준> 당시 작가에게 방송사 측에서 백과사전 분량의 지침서를 내줬는데, 바로 문중의 대응과 관련해 조심해야 할 사안들을 정리한 책이었다고 한다. 문중들이 얼마나 사극 제작진을 압박했으면 그런 책까지 만들었겠는가? 문중의 대응이 법정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지만 제작진 입장에선 소송과 집단적 항의에 시달리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다.

 

 

그런데 정말, ‘후손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고통 받아야 하는 걸까?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역사 인물과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 사이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아무 상관도 없는 개인들인 것이다. A라는 사람의 행동이 B, C, D 등의 사람들에게 낙인이나 고통이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선 몇 백 년 전 사람과 현대인이 연결된다. 문중이라는 간판 아래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배씨 문중이 호소하는 고통도 이해가 간다. 실제로 <명량>에서 악인으로 묘사된 배설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조롱당한 배씨들이 있다고 한다.

 

한국인은 개인을 집단의 구성원으로 보고, 집단의 성격을 통해 개인을 인식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어떤 사람이 물의를 빚으면 그 사람의 고향부터 따져, 경상도 출신이면 경상도를 싸잡아 욕하고 전라도 출신이면 전라도를 싸잡아 욕한다.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들도 고향별로 구분된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강한 집단에 들여보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데 그것이 바로 망국적인 입시경쟁이다. 이 경쟁을 통해 학벌이라는 집단에 들어간 아이들은, 사람을 그 당사자의 개성이 아닌 학벌을 통해 평가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과거 학교별로 서열화됐던 학벌은 요즘엔 캠퍼스별로 세분화됐다. 어느 대학생이 물의를 빚으면 그 학교 전체를 싸잡아 조롱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명예에 극단적으로 예민해진다. 그것이 바로 자기자신의 이해와 직결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벌간판의 명예에 대단히 민감해져 요즘엔 심지어 ‘학벌 훌리건’이라는 악플 부대까지 등장했고, 사회에 진입한 다음엔 향우회, 동창회 등을 찾아다니며 집단의 결속을 다진다. 이렇게 모두가 집단으로 사고하고 집단의 명예에 민감한 사회에서 가장 전통적인 집단인 문중이 조용히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건 우리 사회가 아직 근대적인 개인들의 사회로 진입하지 못한, 전근대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개인들이 문중으로, 고향으로, 학벌로 한 덩어리가 되는 사회이고, 그런 집단성이 각 개인에게 하나의 낙인으로 작용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전근대적 특징은 결국 파벌사회의 바탕이 되고, 사회의 선진화를 가로막는다.

 

물론 <명량> 제작진도 잘한 건 없다. 이순신 장군을 위대하게 그리기 위해 다른 역사 인물을 과도하게 악인으로 그려 역사를 왜곡했다. 이점과 별개로, 그 역사 인물과 아무 상관도 없는 현대의 개인들이 단지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혔다’고 느끼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우리가 문중, 고향, 학벌 등 집단 간판을 벗어던지고 개인으로 홀로 서야 한국사회가 선진화되고, 사극도 옛날 얘기로 ‘쿨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