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중사회문화 칼럼

프란치스코와 이순신 신드롬 무엇이 문제인가

 

 

<명량>의 사상 최대 흥행과 함께 이순신 열풍이 불고 바로 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 열풍이다. 이순신 리더십과 프란치스코 리더십이 곳곳에서 회자되며, 기업 임원들도 이 두 영웅의 리더십 강의를 잇따라 듣고 있다. 왜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현재에 대한 뿌리 깊은 실망, 불신 때문이다. 지금 우리 지도층에 대한 불신이 과거의 지도자, 외부의 지도자에 대한 열광으로 나타난다. 현재 우리 사회의 구성원리에 대한 분노도 다른 원리를 상징하는 외부 지도자에 대한 열광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 온 후 첫 메시지에서 네 가지 가치를 강조했다. 평화, 사람중심경제, 가난하고 소외된 자 배려, 그리고 소통이다. 이것들은 모두 지금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가치들이다.

 

한반도의 남북대결은 더 격화되고 있고, 경제는 여러 정권에 걸쳐서 일관되게 사람 중심이 아닌 수치 중심이었다. 즉, 경제성장률, 수출량, 주가지수 등 경제총량 수치들이 경제의 모든 것이었고 서민의 고통은 수치에 가려졌다. 그 결과는 바로 양극화다. 나라가 위아래로 쪼개진 것이다. 교황은 경제성장의 중심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지난 대선의 화두였다. 여야가 모두 복지를 외쳤고, 당시 여론조사에서 복지를 가장 잘 실행할 대선후보로 박근혜 후보가 꼽히기도 했다. 그래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됐는데 서민복지의 강화가 아직은 체감되지 않는다. 한국은 OECD 선진국들 중에서 여전히 복지후진국에 머물러 있다.

 

소통도 지난 대선의 화두였다. 대립으로 분열된 한국을 통합할 대통합의 지도자로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꼽혔었다. 그것도 대통령 당선에 영향을 미쳤는데, 여전히 한국에선 소통과 화합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마디로 약자는 무시당하고 버려진 존재라는 느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언로가 막혀있다는 느낌. 지도층과 부자들이 서민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밀어주고 끌어주며 잘 먹고 잘 산다는 느낌. 그것이 약자의 보호자로 알려진 교황 열풍으로 나타났고, 교황은 첫 메시지로 네 가지 가치를 제시하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대통령 지시에 장관들이 수첩에 시선을 고정하고 받아쓰기만 하는 권위주의의 나라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준 소탈하고 개방적인 행보도 대안적 리더십으로 받아들여졌다. 대기업 임원만 되도 비행기에서 황제 대접을 받으려 직원을 구타하는 나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용기가 아닌 1등석과 전용 휴식 시설도 없는 일반 전세기를 타고 왔다. 외제 명품차 매출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상황에서 교황은 소형차나 준중형 차만 탄다. 그는 ‘화려한 차를 타고 싶다면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임금과 지도층이 저희들만 살겠다고 도망친 상태에서 자기 목숨을 바쳐 백성들을 지켰다. 한국인은 지금 한국의 지도층을 임진왜란 때 도성을 버리고 이순신 장군을 투옥했던 그 지배자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런 뿌리 깊은 불신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명량>에서 왜적이 명량바다의 회오리에 빠져들었다면 지금 한국인은 지도층에 대한 불신의 회오리에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이순신 신드롬과 프란치스코 신드롬이 이렇게 크게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빠져있는 불신의 회오리가 크다는 이야기다. 그 위기감이 크기 때문에 이순신이나 프란치스코가 동아줄처럼 여겨져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셈이다.

 

조선 백성의 고통에 21세기 한국인이 공감하며 감정이입하는 상황. 배를 버리고 먼저 도망친 세월호 선장이 사회지도층과 동일시되는 상황. 회오리 속에 표류하는 한국호에서 사람들은 믿을 만한 선장을 열망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이상적인 선장이고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네 가지 가치는 항해지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호는 과연 회오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