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의 전설’로 아쉬움을 줬던 박지은 작가가 ‘사랑의 불시착’으로 다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빈도 ‘시크릿 가든’ 이후 오랜만에 ‘현빈앓이’ 현상을 다시 맞았다.
여기서 북한은 ‘동백꽃 필 무렵’의 옹산과 같았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옹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판타지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선 모든 주민들이 서로 알고 지내며, 친한 이웃지간은 마치 한 가족 같을 정도로 정이 넘쳐났다. 첨단문물과 약삭빠름보단 촌스럽고 수더분한 인간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등장인물들의 진한 사투리는 따뜻한 아날로그 정서를 전해줬다.
그런 옹산 풍경에 시청자들이 뜨겁게 반응했었는데, ‘사랑의 불시착’의 북한 사택 마을이 옹산 시즌2였다. 80년대와 90년대를 섞은 듯한 옹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 마을은 우리네 60~70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인터넷은커녕 전기조차 잘 안 들어오는 상황에 아메리카노 커피도 손으로 직접 볶아 만들어야 하는 마을. 그 마을의 주민들은 가족처럼 어울려 지냈고, 옹산 주민들이 옹벤져스가 되어 동백이한테 해꼬지하려는 기자들을 쫓아낸 것처럼 주민들이 똘똘 뭉쳐 괴한들을 물리쳤다.
사투리도 옹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래서 아날로그 정서나 따뜻한 인간미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배경을 북한으로 선택한 설정의 승리다. 이런 판타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이 나온다. ‘응답하라 1988’과 ‘동백꽃 필 무렵’에 이어 ‘사랑의 불시착’이 따뜻한 마을 풍경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북한은 존재 자체가 절대적으로 아날로그다.
배경이 북한이라서 위기감도 절로 고조됐다. 남한과 북한이 엮이는 것 자체가 항상적으로 위기다. 긴장감이 풀어질 틈이 없었다. 남북의 두 주인공이 맺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시청자를 안타깝게 만드는 애틋한 정서도 계속 유지됐다. 탈북민들도 인정할 정도로 북한 생활의 디테일한 면들을 잘 취재해서 표현했기 때문에, 우리 시청자들의 호기심도 자극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요인은 시청자를 설레게 하는 로맨스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두 배역의 캐릭터가 기존 로맨스 드라마의 관습을 깼다는 지적들이 있었다. ‘재벌2세와 일반 여직원’이 전형적인 구도인데 이 드라마에선 여주인공이 재벌2세겸 자수성가한 기업가인 반면 남주인공은 중대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형적인 구도의 일종이었다. 여주인공이 재벌이라고는 하지만 북한에 간 순간부터 오갈 데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있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남주인공 집에 얹혀살며 남주인공의 보호를 받았으니, 기존 로맨스 구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여주인공은 남한에 돌아와서 한국 최고 신분을 회복했을 때조차 남주인공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남주인공도 재벌이 아닐 뿐 북한 2인자인 총정치국장의 외아들로서, 귀족 같은 존재였다. 총정치국장의 집도 거의 남한 재벌집을 방불케 했다. 그런 귀족이 ‘불순한 아랫것’의 욕심 때문에 위험에 처하며 여주인공을 지켜준다는 구도인데, 기존 재벌 로맨스드라마에 흔하게 나왔던 관습이다.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지켜줄 때, 가장 전형적인 설정이 돈을 쓰는 것이지만 그 외에 몸을 쓰는 설정도 있다. ‘사랑의 불시착’에선 남주인공이 거의 ‘본’ 같은 전투 실력으로 위험 세력을 물리쳤다. 그런데 그 와중에 로맨틱하게 피아노까지 쳤고 지적인 매력도 풍겼다. 단지 재벌2세만 아닐 뿐 남주인공을 이상화하는 기존 로맨스 드라마 설정을 그대로 구현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요즘 대두되는 페미니즘 흐름과는 동떨어진 구시대적 로맨스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전형적인 설정이 오히려 성공요인이 되었다. 멋진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보호하는 도식적 설정에 로맨스드라마 팬들이 열광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아날로그 정서와 고조되는 위기감, 애틋함, 북한 사투리 감초 연기 등이 더해져 모처럼 대박 로맨스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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