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뎁의 네버랜드를 찾아서와 상상의 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전미비평가협회에 의해 2004년 최고의 영화중 하나로도 선정된 바 있으나, 아카데미 영화제에선 두 명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위광에 가려 작곡상을 받는데 그쳤다.


감독 마크 포스터는 69년생, 우리나이로 이제 40살이다. 그의 <몬스터 볼>은 할 베리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그 다음 작품인 <네버랜드를 찾아서>도 비록 상은 하나밖에 못 받았지만 무려 7부문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니 이대로만 나이를 곱게 먹는다면 일이십여 년 후엔 마틴 스콜세지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정도의 대접을 받는 사람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007 22탄을 작업하고 있다. 2008년 개봉 예정이다.


난 처음에 <네버랜드를 찾아서>란 제목과 조니뎁, 케이트 윈슬렛이 나온 포스터 이미지를 보고 어른이 된 피터팬이 네버랜드로 돌아가는 내용의 환타진 줄 알았다. 게다가 더스틴 호프만도 나오질 않는가! 더스틴 호프만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피터팬 영화에서 후크선장을 맡았었다. 주인공 조니뎁도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해적으로 나왔었고, 케이트 윈슬렛은 어릴 때 웬디역을 맡은 바 있다고 하니, 피터팬 이야기를 위한 진용임이 여실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피터팬 이야기’가 아니라 ‘피터팬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04년은 소설 ‘피터팬’이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영국의 극작가 제임스 베리에 의해 1904년 발표된 피터팬, 이 영화는 그 피터팬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다. 조니뎁이 맡은 역할은 피터팬이 아니라 피터팬을 창조하는 극작가 제임스 베리역이었다.


영화는 제임스 베리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작품이 실패하자 베리(조니뎁)은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공원벤치에서 신문을 꺼내 읽던 베리의 눈에 신문을 스크랩한 빈자리를 넘어 실비아(케이트 윈슬렛)가 보이고, 순간 발치에서 “죄송합니다만, 제 소매를 밟고 계시거든요.”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래를 보니 어린 아이가 벤치 아래에 누워 있다. (난 순간 네버랜드에서 아이들이 피터팬을 찾아 마법처럼 나타난 줄 알았다는... 관객이 너무 오바해서 상상해도 곤란하다...-_-;;;) 그 아이는 벤치 아래가 지하감옥이라며 자기가 지금 지하감옥에 갇혀있다고 주장한다. 베리는 아이와 죽이 착착 맞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실비아의 아이였다. 이렇게 해서 베리는 실비아의 가족(실비아 + 4형제)과 조우한다.


신문 넘어 홀연히 나타난 실비아. 신문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정보를 담은 현실의 축약도다. 아이가 신문을 보던가? 신문을 보는 것은 어른이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동화의 세계에서 신문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을 뜻한다. 동화의 세계는 상상의 세계고 신문의 세계는 논리적 언어의 세계다.


음식을 먹는 아이들과 앞치마를 두른 엄마, 그리고 신문을 펼쳐든 아버지, 전형적인 헐리웃 영화에서의 가족 식탁 풍경이다. 신문이 상징하는 것은 아버지의 세계다. 어른이 된다는 것, 아버지의 법. 아이에게 이 세상은 혼돈이다. 아이가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면서 아이는 금지를 알게 되고, 구분을 알게 되고,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어른이 된다.


의기소침한 베리의 신문 한 복판에 뚫린 구멍으로 실비아는 등장한다. 카메라의 초점이 처음엔 신문에 맞춰져 있다가 곧 실비아로 이동(out of focus) 된다. 금지의 세계엔 그 신문 구멍 같은 틈이 있다. 이 세상은 완전무결하게 조직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심없이 안심하면서 딛고 있는 이 세계는 기실 놀라울 만큼 허망한 것이다. 빈틈없이 조직된 사회시스템, 그것을 축약한 신문, 그 사이로 실비아는 등장하고 베리의 눈은 신문에서 실비아로 초점을 옮긴다. 그리고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을 따라 관객도 실비아 가족의 세계와 근접조우한다.


몽상기질이 있는 작가 베리가 살고 있는 상상의 세계와 실비아 가족의 세계는 코드가 맞는다. 베리는 자기가 데리고 온 개를 곰이라 하며 실비아 가족에게 우스꽝스런 쇼를 선사한다. 실비아와 그 아이들은 이를 재밌게 지켜본다. 그러나 실비아의 셋째 아들 피터는 불만이다. “이런 건 뭐하러 보는 거야, 엄마? 이건 바보짓야. 그냥 개일 뿐인데”


맞다. 개는 개다. 개는 곰이 될 수 없다. 개가 곰이 되는 건 상상의 세계에서다. 신문에서는 개와 곰이 뒤바뀔 수 없다. 만약 개가 곰이 되는 것이 신문에서 용인된다면 인간의 문명이 무너진다. 개는 개고, 곰은 곰이고, 1+1은 2이라는 것을 분명히 정하는 것에서부터 문명은 시작된다. 그러나 빈틈은 남는다. 신문 너머로 흐릿하게 존재하는 진실의 세계. 진실에 닿기 위해선 상상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상상을 잃은 삶은 충만할 수 없다.


베리는 피터에게 말한다. “그런 시각으론, 어린 친구. 아무 것도 보지 못할 거야. 상상의 나래를 펼쳐봐. 난 곰을 볼 수 있거든.” 그렇게 실비아 가족과 즐겁게 지낸 후 집에 돌아온 베리는 처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한다. 그러나 무관심한 처. 베리의 처는 100% 어른이었다. 상상을 잃어버린.


베리는 어려서 형이 죽은 후 상심하는 어머니를 위해 형으로 분장한다. 그 때부터 베리는 어린 세계에 고착됐다. 성장을 멈춘 것이다. 유아와 어른의 세계의 중간계에 머물러 있는 베리. 그곳이 상상의 세계, 네버랜드다. 반면 실비아의 아들 피터는 일찍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 아버지가 되려 한다. 아이이면서 어른이 된 것이다. 그래서 피터는 상상을 믿지 않는다. 베리에겐 개이기도 했다가 곰이기도 한 것이, 어른이 돼버린 피터에겐 단지 ‘개일 뿐’인 것이다.


베리의 처는 네버랜드에 사는 베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에게 소외된 그들 부부는 베리가 실비아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균열을 일으킨다. 베리의 처는 베리에게 말한다. “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널려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난... 당신이 날 그리로 데려가 줄 거라고 기대했었죠.”


그러나 그런 세계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여기에서 단지 ‘상상’만 하면 네버랜드는 열린다. ‘상상’을 잃어버린 베리의 처와 피터. 베리의 처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나이’를 먹은 것이다. 그러나 피터는 어리다. 단지 마음이 닫혀 있을 뿐.


베리는 실비아 가족과 어울리면서 피터에게 ‘상상’하는 힘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실비아의 아이들과 함께 인디언 놀이도 하고, 해적 놀이도 하면서 베리는 네버랜드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바로 피터를 위한 이야기, ‘피터팬’이다.


중반부에 영화는 조금 느슨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무대에 연극 피터팬이 올라가는 순간 영화는 돌연 활기를 띈다. 베리는 신문 틈 사이로 나타난 실비아 가족처럼, 피터팬이 초연되는 극장 좌석을 군데군데 비워놓고 아이들을 앉힌다. 그 아이들이 관객을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아이들의 믿음이 어른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개가 곰이 되는 그 믿음.


영화 속의 연극 관객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도 그 상상의 세계에 동화된다. 피터팬의 막이 오른 후 당신은 흥분을 경험하리라. 아이들이 하늘을 난다! 팅커벨이 죽어갈 때 피터팬이 박수를 치면 요정이 살아난다길래 나도 박수를 치고 말았다. 피터도 박수를 치고 베리를 싫어하던 실비아의 어머니도 박수를 쳤다. 그리고 네버랜드가 펼쳐진다. 헐리웃 미술팀의 내공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신문 같은 언어의 묘사는 무의미하다. 보시라. 느끼시라.


영화완 달리 실제 제임스 베리와 피터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고 한다. 제임스 베리는 키가 매우 작은 성불구자였다는 얘기도 있고, 실비아의 아이들은 다섯 명이었는데, 제임스 베리는 피터보단 막내 마이클을 더 좋아했고, 피터는 피터팬의 성공을 부담스러워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어떤 이는 베리가 실비아의 다섯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잘 돌봤다고 하지만, 베리가 죽을 때 피터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아 피터가 고생했다는 얘기도 있고, 구체적으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무대 뒤는 쓸쓸하다.


그러나 어떠랴. 눈앞에서 요정이 빛나고 아이들이 하늘을 나는데. 믿으라지 않는가. 영화를 보는 동안은 영화를 믿으시라. 따지면 상상의 세계를 잃는다. 영원히 네버랜드에 갈 수 없는 베리의 처처럼. 영화 아닌가.


* 피터팬은 아이 이름 피터와 팬의 합성어라고 한다. 팬(PAN)은 그리스신화의 목양신으로 몸은 인간, 발과 귀와 뿔은 산양의 모습이고, 산과 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리는 게 특기라고 한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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