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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정도전에서 왜 정도전이 사라졌을까

 

<정도전>은 참 이상한 작품이었다. 보통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가장 부각된다. 하물며 <정도전>처럼 주인공 이름을 내세운 작품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정도전>에선 주인공 정도전의 존재감이 약했다. 상대역들인 이인임, 이성계 등이 더 화제에 올랐다. <썰전>에서 조재현이 백상 주연상 받을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 조재현에게 사과한 일까지 있었을 정도로, 정도전 역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정도전이 사람 같지 않았다. 이인임이나 이성계 등은 모두 희로애락을 드러내며 자연스러운 대화체로 대사를 했다. 반면에 정도전은 초반 천민마을에 있었을 때 말고는 무표정과 딱딱한 말투로 일관했다. 마치 로봇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감정이입을 방해한 것이다.

 

정도전은 위로는 주군을 모시고 아래로는 당여를 규합해 역성혁명을 준비한, 즉 고도의 사회적 행위를 한 사람이다. 그런 사회적 행위를 잘 하는 사람의 특징은 능수능란한 언변과 인간미가 묻어나는 분위기에 있다. 보통 중진급 국회의원들에게서 이런 특징을 잘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정도전> 속 정도전은 너무 딱딱해서 마치 정치를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정도전의 지사적, 사상가적 풍모에 너무 짓눌린 나머지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의 정도전을 그리는 데에는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인간적인 면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이인임이나 이성계가 더 주목받는 현상이 나타났다.

 

네티즌이 일반적으로 역사 인물 정도전과 그가 주도한 조선왕조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도, <정도전>이 받는 뜨거운 찬사 속에서 정작 주인공 정도전이 외면당한 것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이 기득권 사대부 집단에 휘둘리다 자멸했다는 것을 뻔히 아는 네티즌 입장에선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정도전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미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다 아는 우리의 입장과 고려말을 살았던 정도전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정도전 입장에선 몇백 년 후에 터질 세도정치, 당파싸움보다 당장 문제가 되고 있는 귀족정치를 끝장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정도전은 자기 시대의 과업을 수행한 것이고, 조선 후기의 문제는 그 시대 사람들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문제가 나타나는 형태는 다르지만 문제를 만드는 본질은 같다. 고려말 귀족정치건 조선말 사대부 세도정치건 본질은 양극화였다. 권력자의 창고엔 쌀이 썩어나는데 일반 백성은 굶주려 죽어가는 현실 말이다. 정도전은 그것을 ‘백성들에겐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다’고 표현하며 ‘귀족들의 창고에 들어찬 곡식을 백성들에게 공평히 나누는 것’이 바로 개혁이라고 했다.

 

드라마 <정도전>은 바로 그런 정도전의 개혁정신을 생생하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일반적으로 그 전까지의 사극이 권력투쟁과 계략 중심으로 정치를 그린 데에 반해, <정도전>은 혁명가 정도전의 가치관을 형상화하고 정치를 그런 가치의 차원에서 수준 높게 그렸다는 점에서 상찬을 받을 만하다. 또 현대 국회에 대입해도 될 듯한 이인임의 생생한 대사들도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정도전>의 성취였다. <정도전>은 모처럼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한, 한국 공영방송의 가치 증명이었다.

 

드라마 <정도전>은 나왔으니, 이젠 우리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이 시대의 정도전이 나올 차례다. <정도전>은 끝났어도 민본의 대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