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역대 최고 사회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중반 이후부터가 그랬다. 재벌 부실 회사채 판매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룬 후부터 <개과천선>은 그 이전까지 한국 사회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했던 경지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법조마피아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 드라마는 없었다. 그다음 키코사태를 연상시키는 은행의 불량 파생상품 판매 의혹 사건을 다룰 땐, 작품의 세밀함이 한 차원 더 나아갔다. 그때까지 한국드라마에서 본 적이 없던 전문 금융용어와 수치가 난무하는 작품이 탄생했다.
물론 다른 사회드라마들도 강자의 비리를 의례히 그리곤 했지만, <개과천선>은 거기에서도 시원하게 한 꺼풀을 더 벗겨 시스템의 심연을 드러냈다.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미처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았던 금융과 로펌의 세계를 그려낸 것도 찬사를 받을 만하다. 이 부문만 보면 역대 최고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런 작품이 어쩌다 조기종영이라는 비운을 맞게 됐을까? 방송사 측에선 조기종영의 이유가 배우 스케줄 때문이라고 하지만, 시청률이 높았다면 방송사가 그런 문제 정도는 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시청률이 높았다면 애초에 결방도 자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시청자에게 외면 받은 것이 조기종영의 근본적인 이유로 보인다.
일단 초반 구도가 식상해 시선을 모으지 못했다. 김명민이 냉정한 변호사로 등장했는데 이것은 전작인 <드라마의 제왕>과 캐릭터가 겹쳐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김명민은 그동안 드라마에서 냉정한 엘리트 역할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이번엔 <불량가족>에서처럼 껄렁껄렁한 캐릭터를 선보였다면 큰 화제가 됐을 것이다. 반대로 <개과천선> 초반은 식상한 느낌이었다. 이때만 해도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기억상실로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된다는 설정도 그리 특이할 것이 없었다. 그 와중에 김석주가 주로 관여한 사건이 재벌 2세 성폭행 사건, 여배우 살인 의혹 사건 등이었기 때문에 그리 특이할 것이 없는 평범한 전개가 이어졌다. 물론 그 사이사이 삼성기름유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삽화가 그려졌지만 대체로 여느 정의파 사회드라마에서 일반적으로 보는 수준의 설정이었다.
그러다 작품 중반 재벌 회사채를 다루기 시작한 다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갑자기 작품이 역대 최고 사회드라마 수준으로 대도약을 해버렸다. 재벌 2세 성폭행 사건 같은 사족들을 다 빼고,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전개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초반부터 훨씬 큰 화제를 모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시청률에 대한 고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불륜 재탕삼탕이 통하는 한국에서 드라마가 금융사건을 정면으로 다루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가는 인턴 여변호사와의 ‘썸’, 선정적인 재벌 성폭행 사건 등을 배치해 시청자를 끌어들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딱딱한 법정 싸움을 무겁게 다루는 이 작품의 근본적인 속성상 결국 외면 받고 말았다. 시청자들은 아예 질척질척하거나 달콤한 것을 원하지 이 작품처럼 건조하게 가면서 시청자에게 머리 쓸 것을 요구하는 극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결국 시청률은 시청률대로 놓치고, 초반의 진부함으로 인해 화제몰이도 못하고 말았다. 중반 이후 비로소 작품의 진면목이 드러났으나 그땐 이미 형세를 돌이키기가 어려웠고, 설상가상으로 조기종영 발표가 난 이후론 작품의 치밀성이 와해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이래저래 비운의 작품, 저주받은 걸작으로 남을 태세다.
이건 작가의 탓이 아니다. 어렵고 의미 있는 작품을 철저히 외면하는 시청자의 문제다. 그런 시청자 때문에 작가는 본격 사회드라마를 치밀하게 준비하면서도 재벌 성폭행 같은 ‘떡밥’을 투척해 구차한 ‘낚시’를 해야 했고, 결국 철저한 외면으로 조기종영까지 당하게 된 것이다. <개과천선>이 그려주는 우리 현실도 비극이고, 드라마 <개과천선>이 당한 냉대도 비극이다. 극중 김명민 대사처럼 ‘가슴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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